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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도 녹아 풍경으로 남은 ‘여름 속의 겨울’

등록 2009-08-13 15:45

청도 석빙고

296살 최고령 냉동고, 1개 130㎏ 십만 개까지

보물을 품다 전기에 따귀 맞고 스스로 보물로

 

 

통도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무풍한송(舞風寒松:언제나 바람이 춤추듯이 불어오니 주변의 소나무는 늘 차가운 기운을 머금고 있다)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길이 다할 무렵 일주문 곁에는 계곡 위로 한 사람이 지나가면 딱 알맞은 폭의 무지개형 돌다리가 걸려 있다. 썩 걸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차량을 배려한 일자형의 다리들 틈바구니에서 사람만을 위한 다리인지라 그런대로 귀하고 운치가 있다. 경봉(1892~1982)선사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고 했다. 큰절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신의 주석처이던 극락암에도 비슷한 형의 아치형 다리를 연못 위로 걸어놓았으니 선사께서는 꽤나 홍예교를 좋아하신 모양이다. 

 

언 강 위의 톱날 든 장인, 살얼음판 걷듯 조심 조심

 

시간 여유가 있어 내친김에 몇몇이 어울려 함께 길을 나섰다. 인근 청도로 갔다. 봄이면 자두 복숭아 감꽃이 가슴을 벌렁거리게 한다는 고장이다. 화양은 구읍내였던 인연으로 당시의 위세를 보여주는 읍성과 향교 관아 등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시선이 꽂힌 곳은 묵은 화강석의 돌다리 홍예교가 드러나 있는 석빙고였다. 이것이 이 읍내의 옛 영화를 상징적으로 제대로 보여주는 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청도, 아니 화양읍의 재발견이었다. 석빙고는 사람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해서 어디서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와 과학기술이 동시에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남아있는 경주 청도 안동 창녕 현풍 영산 등 6개 모두 남김없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청도 석빙고의 이력 역시 만만찮았다. 경주 석빙고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1713년 숙종 때 쌓았다는 기록으로 봐서 축성연대도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입구에 빙고 설치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된 석비가 남아 있어 자료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경주 석빙고는 1738년 영조 때 당시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개축했으며 4년 뒤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 이전에는 목빙고였던 모양이다. 

 

〈시경〉에 “얼음을 층층이 켜서 언덕 그늘진 곳에 들여 놓으니“라고 한 것에서 보듯 빙고의 역사는 참으로 오래되었다. 한겨울에 얼음을 채취할 때는 가장 추울 때임에도 불구하고 더 추우라고 일 시작 전에 기한제(祈寒祭)를 올렸다. 한 덩어리를 130㎏ 정도로 잘라서 장정 몇 사람이 새끼로 묶어 함께 옮겼다. 볏짚과 쌀겨 등으로 포장해 일만개에서 십만개까지 층층이 쌓았다고 하니 그 수고로움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톱날을 들고서 얼음 위를 걸을 때는 그야말로 얇은 얼음 위를 걷듯(이를 여리박빙如履薄氷이라고 한다)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시름과 의심덩어리도 ‘빙소와해’

 

익숙해지면 얼음 위를 자유로이 김연아처럼 달릴 수 있게 된다. 육상이나 빙상이나 별 차이가 없는 자유자재인 경지를 ‘여빙릉상행(如氷凌上行)’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석빙고에 쌓을 얼음을 켜는 일꾼에게는 숙련도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뚫어진 강물의 얼음 위에서 톱날을 쥐고 있는 매우 위태한 상황이 된다. 여기서도 살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세월이 흘러 이끼 낀 화강석 아치교 밑으로 석빙고 바닥이 훤하게 보였다. 그 옛날 전성시대에는 아치 위로 흙이 덮여 있었을 것이고 그 위엔 물이 스며들지 말라고 기와도 덮었을 것이다. 오늘날 그 기능은 전기냉장고에 물려주고 이제 빈 공간에 아무것도 없이 바닥 끝까지 햇살이 닿는다. 보물만큼이나 귀하던 얼음을 품고 있던 역할은 없지만 대신 스스로 보물 제323호가 되었다. 이미 기와도 없어지고 얼음도 녹아 버렸다.

 

 와해빙소(瓦解氷消)라

 한순간에 날기와가 물에 풀리듯 얼음이 녹아버리듯

 

공부하던 학인이 가슴 속에 의심덩어리가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임제 선사에게 따귀를 한차례 얻어맞고서 그 의심이 얼음 녹듯이, 굽기 전에 흙으로 만든 날기와가 물에 풀리듯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음 속에 있던 의문이 일시에 해결됨을 ‘빙소와해(氷消瓦解)’라고 했다.

 

석빙고의 따귀는 전기였다. 1893년 고종 때 전력사업이 시작되면서 서울의 동서 양빙고가 폐쇄된 까닭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동빙고동 서빙고동이라는 이름으로만 남았다. 그래도 청도에는 철길을 옮기고 난 뒤 용도없는 기차 굴을 ‘감 와인을 숙성시키는 터널’로 살려 놓았으니 그 옛날 ‘석빙고 정신’이 면면히 이어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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