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님글방/원철스님]
다스한 ‘절집’ 어느새 관광개발로 ‘공원화’
오랜만에 ‘무풍한송(舞風寒松)’이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는 이 길을 걸었다. 더위마저 식혀주는 차가운 기운의 소나무와 계곡에서 춤추듯이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 가능한 한 천천히 걸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늘 차를 몰고 쌩하니 지나갔던 길이다. 그동안 자동차에 내주었던 길을 다시 인간이 되찾아오고 있다. 제주 올레길을 비롯하여 지자체마다 방방곡곡에 걷는 길을 다투어 복원하고 있다. 이제 길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된 걷기는 그래서 자기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명상을 위한 또 다른 수행공간으로 바뀌었다. 그 오래된 흙길은 묵은 소나무 때문에 더욱 빛났다. 그래서 해질 무렵 다시 한번 천천히 걸었다. 사실 이 소나무를 심은 사람은 듬직한 줄기와 솔잎 그늘을 볼 수도 누릴 수도 없었다. 그래도 수백 년 후를 내다보면서 혼자 묵묵히 작은 나무만을 심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세월이 흘러 오늘의 무풍한송 길이 만들어졌다.
깅릉 선교장 활래정 사립문에는 “새는 물가의 나무로 자려 오고(鳥宿池邊樹) 객승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鼓月下門)”는 주련이 걸려 있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 779~843)의 글인데 문을 ‘두드린다(鼓)’와 ‘민다(推)’를 두고 어느 글자를 선택해야 할지 한참 고민을 했다고 〈당시기사(唐詩紀事)〉는 말한다. 이는 글을 고친다는 퇴고(推敲)라는 말의 출전이기도 하다.
모르긴 해도 아마 어느 날 관동팔경의 달빛에 취해 시간가는 줄 모르던 어느 만행승이 늦은 밤에 홀로 걸망을 메고 와서 묵어가길 청하며 문을 두드렸던 일을 기억한 이 집 주인장에 의해 내걸렸을 것이다. 이건 가문의 수준이기도 하지만 선비사회의 또 다른 정신문화의 여유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집은 한 쪽의 살림집 몇십평을 빼고는 텅텅 비워 놓았다. 나그네를 주인이 맞이하던 그런 따사로운 훈기는 찾아볼 수가 없고 그냥 무심한 관광객만 밀물처럼 들어오고 썰물처럼 빠져나가길 반복할 뿐이다.
사찰이 수도원의 기능을 제대로 할수 있게 해야
사찰은 집인 동시에 절인 까닭에 절집이라고 부른다. 즉 절은 수행기도처이면서 동시에 찾아주는 사람을 위한 다스한 생활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절’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절집’이라고 부르길 좋아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산중의 주인장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이며 지친 몸을 쉬게 했고 밥도 주면서 또 숲길을 걷게 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며 묵어가길 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177년 역사의 정신적인 문화공간은 수십년 전 어느 날 느닷없이 공원이 되어 있었다. 1967년 이 땅에 〈공원법〉이 도입된 이후의 일이다. 공원에 온 감당할 수 없는 인파들 때문에 절집은 주인노릇을 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수도원 고유의 정신적 역할을 위한 수행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유지인 사찰림마저 물질적 가치에만 기준을 두고 공익의 이름으로 개발을 서둘렀다.
기도수행처와 공원, 그리고 보존과 개발이라는 대립과 갈등이 수시로 노출된 세월이 벌써 40년을 넘겼다. 그동안 일반국민들도 국립공원이라는 동일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수도원과 관광지, 그리고 자연생태지역과 사유림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몰라 우왕좌왕해야 했다.
관광지는 관광지의 몫이 있고 수도원은 수도원의 몫이 있다. 그래서 무풍한송의 그 길에는 7월이 시작되는 날, 전국에서 1000여명이 넘는 주지 스님들이 한낮인데도 불지종가(佛之宗家)인 통도사 일주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용맹정진하며 사찰 경내지의 일방적인 공원지정을 해제하고 문화유산지역으로 지정해줄 것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수도원의 역할을 포기해야 할 만큼 관광개발이 국민에게 의미있는 일은 아닌 까닭이다. 이는 영혼있는 문화가 국가경쟁력임을 다시금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요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84년에도 정부의 ‘사찰공원화’에 대하여 성철(1912~1993) 선사는 이런 근시안적인 소탐대실의 어리석은 정책에 참다 참다 한 마디 아니할 수 없었다.
“사찰이 수도원 기능을 하지 못하고 유흥장으로 변모된다면 거기에 와서 노는 국민의 정신마저 결국 황폐화되고 말 것입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