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번성’ 누구나 꿈꾸는 원초적 열망
전국에 널린 태실들 무얼 기원하고 있나
누군들 자기 가문의 번성을 꿈꾸지 않으랴. 하지만 예전만큼 ‘가문의 영광’을 운운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적게 낳아 잘기르자’고 하다보니 이제 가문은 고사하고 사촌개념도 없어지게 되었다. 설사 현실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명문 종가집을 바라보는 시각은 누구든 반쯤 부러움과 반쯤 시샘이 함께하기 마련이다. 오래 된 종택(宗宅)은 찾을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영원성을 향하는 보통사람들의 뿌리본능을 달래주고도 남음이 있다. 때로는 궁궐이 빈집인 것과 대비되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손창성을 기원하는 마음은 신분의 높고 낮음과 빈부의 귀천에도 불구하고 별로 차이가 없다.
마을집은 핏줄의 융성을, 절집은 법손의 창성을
《삼국사기》에는 김유신 장군의 태를 보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현재 충북 진천에 남아 있다. 현재 조계종의 종조인 신라의 도의국사의 태반줄을 산모퉁이 하수(河水)가에 묻었는데 큰사슴들이 그 자리 지키기를 일년여를 계속했다고 전한다. 태실의 형태는 대부분 고승들의 부도탑과 비슷하다. 따지고 보면 태어남과 죽음이 결코 둘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자손과 법손의 융성을 바라는 마음은 같다고 하겠다. 마을집은 핏줄의 융성을 기원했고 절집은 법손의 창성을 발원했다. 출세간을 막론하고 모든 것이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게 갖추어진 제왕들도 죽은 후에는 도성 백리 안의 명당을 찾아다녔다. 태어난 후에는 태실자리를 찾아 전국 명산을 다니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도 태봉 훅은 태장이라는 지명이 40여군데 이상 남아 있다. 당시 태실관리를 위해 그 인근지역은 행정적 경제적 혜택을 주었다. 깊은 산중인 경우에는 근처 사찰이 태실수호를 위한 재실기능까지 겸해야 했다.
경북 성주의 선석사(禪石寺)도 그랬을 것이다. 인근에 세종대왕 자녀의 태실 20여기가 집중으로 분포된 전국 최대의 태실자리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위치와 이름에 걸맞게 칠성각이 대웅전과 나란히 병렬한 채 작은 세칸집이지만 그런대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법당 뒤편에 숨어있듯 서 있는 한 칸짜리 산신각과 대비된다. 일반적인 사찰건축은 산신각 칠성각이 같은 크기의 한 칸 규모로 본당과 멀찌기 떨어져 위치하는 것이 상례인 까닭이다. 칠성각은 자손 잘되기를 기원하는 모성애와 그 정성이 모여있는 기도처이다. 그 전통을 이어받은 태장전(胎藏殿)을 이즈음 새로 지었고 동시에 인근구역 전체를 생명문화공원으로 조성하려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태실명당이 제대로 발복(發福)하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에도 선의 꽃그늘이 드리워져 오늘에 이르고
국도인 큰길부터 목적지로 가는 샛길까지 ‘세종대왕 자태실’과 ‘선석사’는 안내표지판이 늘 함께 있었다. 표지판을 따라 절 맞은 편 언덕길을 올라가니 곧 태실자리가 나타났다. 안내판에는 당시 예조판서인 홍윤성의 글을 한문과 한글로 병기해 놓았다. 〈세조실록〉 29권에 전문이 실려있다. 전체요지는 왕실번영의 축문이었다. 하지만 이 한 문장에 모든 게 압축되어 있었다.
어혁선리(於赫仙李) 본지만엽(本 支 萬 葉)
아! 빛나는 오얏나무 본 가지에 만 잎사귀라
물론 오얏나무는 이씨왕조이다. 천 가지 만 잎사귀로 번성을 기원했다.
선불교의 교과서인 《육조단경》은 ‘일화오엽(一花五葉)’을 말하고 있다.
일화개오엽(一花開五葉) 결과자연성(結果自然成)
한 꽃이 다섯 잎을 여니 결과가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달마대사의 게송인데 혜능선사의 입을 빌어 기록해 놓았다. 한송이의 꽃인 달마의 사상이 혜능을 통하여 다섯줄기로 가지치기를 하여 중원천하로 퍼져나가길 기원한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여섯 잎(六葉)’이라고도 했다. 그건 꽃도 잎인 까닭이다. 그 바람대로 한반도에도 선(禪)의 꽃그늘이 드리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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