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빗자루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정갈한 조계사 마당 한켠에 마련된 빈소에 들렀습니다. 이미 하얀 국화꽃을 들고 줄을 서서 조문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출근길의 선남선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합장하고 고개숙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방명록을 대신하여 고인께 하고싶은 말을 남기라는 하얀 광목천에는 추모기간 내내 쓰여진 매직펜 글씨가 구불구불 가득합니다. 노란 리본도 법당 앞에 만장마냥 줄지어 매달려 있습니다.
대통령 후보 시절 만난, 소탈·소박했던 그
생각해 보니 대통령 후보 시절 해인사를 방문했을 때가 그와의 첫대면 이었습니다. 여느 후보들처럼 세계문화유산인 장경각을 방문했었지요. 당시 주지인 세민스님과 함께 참배를 하였고 팔만대장경에 대한 설명은 자리를 같이 한 필자가 해드렸습니다. 참으로 소탈하고 소박했던 그 때 모습이 다시금 가만히 떠오릅니다.
영단 아래쪽 흑백사진을 바탕으로 함께 서 있는 컴퓨터 글씨체의 유언장인 ‘무현 선사의 임종게’ 14줄 172자를 첫줄부터 끝줄까지 가만히 읽어 내려봅니다. 이 시대의 또다른 ‘어록’인지라 참으로 많은 걸 생각하게 해줍니다. 아무리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해도 여전히 봉하마을에는 조문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으로 구별하면서 서로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무정물인 화환마저도 놓을 수 있는 꽃과 들어올 수 없는 꽃이 서로를 원망합니다.
서울광장과 청계광장은 분향소를 만들 수 없는 곳이라고 하는 바람에 덕수궁 대한문 앞의 시민과 경찰은 또다시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외신은 북방에서는 조전이 왔다고 하고, 서방언론은 학생과 좌파성향 시민의 인파라는 소식을 함께 들려줍니다. 이 땅의 진보와 보수를 자처하는 정치인들은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곳의 가장 가까운 빈소에서 향을 올리면서도 머릿속은 이후 손익계산에 여념이 없는 것이 이 사바세계의 현실입니다.
짚신 한 짝은 빈 관에, 한 짝은 손에 들고 훨훨
1700여년 전 달마대사는 인도를 떠나 신천지 중국으로 와서 당신이 꿈꾸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을 지닌 채 무던히도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기득권의 정치적 사상적 벽은 너무도 두터웠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아름답지 못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빈 관 속에 짚신 한짝만 남겨두었습니다. 나머지 한 짝은 손엔 쥐고서 그렇게 훌훌 떠났습니다.
남은 자들의 ‘어디로 가시느냐’는 물음에 ‘서쪽으로 간다’는 대답을 남겼습니다. 이 땅은 당신이 머물기에는 그 때까지 시기상조였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뿌린 씨앗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시절이 무르익으면 꽃은 피기 마련인 것입니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남아있는 사람들은 또 살아가야 합니다. 떠나면서 머물 이를 달래주지만, 남은 이는 또 가신 분을 안타까워 하는 것은 인지상정 입니다. 미안해 하거나 서로 원망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사회의 고질화된 지역·계층·이념의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여 화합의 계기로 승화시켜 달라는 화두를 던져놓고는 저만치 가셨습니다.
까마득한 과거사가 된 채 ‘도로’가 될까 걱정
고산지원(976~1012)스님은 열반하면서 스스로 지은 제문의 서두는 이런 글로 시작됩니다.
‘내 허물을 더 부풀리지는 말고, 너희들은 항아리 두개를 합해 만든 관으로 장례를 지내다오.’
허물을 부풀리지 말라는 말 속에는 업적도 자랑하지 말라는 내용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소박한 다비식을 위해 장독대에 이리저리 뒹굴며 남는 옹기를 이용하도록 부탁한 것입니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알고보면 그 마음이 그 마음입니다.
혹여 남은 이들이 딴생각 할까봐 단호하게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오래된 생각이다.”
영결식을 마치고 49재가 끝날 무렵이면 모두가 또 일상사에 매몰될 것입니다. 이번 일 역시 까마득한 과거사가 되어버린 채 ‘도로’가 될 것이라는 또다른 쓸데 없는 걱정이 일어납니다.
이래저래 고인마저도 힘겨워했던 그 현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참으로 슬프게 합니다.
원망을 풀어내는 진언(眞言)을 모두에게 올립니다.
옴 삼다라 가닥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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