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님글방/원철스님] 매화
경계 넘어 피는 매화처럼 좌·우 구분 말고 함께 하길
누비옷을 벗었다. 2월인지라 아직 겨울이지만 성급한 봄의 기운을 먼저 만난 까닭이다.
예전에 어떤 성급한 이는 앉아서 꽃이 피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꽃피는 곳까지 먼저 찾아가겠다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신바닥이 닳도록 헤매도 봄을 찾지 못하고 결국 지쳐서 돌아오게 되었다. 마당에 들어서면서 축 쳐져있던 고개를 드니 담벼락에 매화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는 그 오래된 일을 떠올린다.
최영경, 봄에 핀 매화는 매화 아니라며 찍어 버려
설중매는 추위 속에서도 봄을 알려주는 선지자 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지혜로운 이는 매화를 좋아했다. 혹여 그 매화가 피는 곳이 두 지역을 동시에 아우른다면 그 의미는 겹으로 살아나게 된다.
가야산을 경계로 경남과 경북이 맞닿아 있는 성주 수륜면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는 백매원(百梅園)이란 정원이 유명했다고 전한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선비가 두 지역을 이어주는 길목에 초당을 짓고서 매화 백그루를 심은 후 백매헌(百梅軒)이란 현판을 내건 것에서 연유한다. 현재 인근의 종가댁도 ‘마을 한가운데 있는 매화나무 집’이라는 뜻의 중매택(中梅宅)으로 불린다. 근처에 한강대(寒岡臺)도 있다. 인걸은 가도 흔적은 남는 법이다. 임진년에는 고향 땅에 소장된 책들을 삼재(三災)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해인사로 옮겨 전란을 피하도록 했다. 유교와 불교를 넘나드는 그의 합리적이고 여유있는 안목이 더해진 까닭이다.
초당에 어느 날 친구 최영경(崔永慶)이 찾아왔다. 마침 주인장은 출타 중이였다. 이 때다 싶어 객은 하인에게 도끼를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사정없이 백 그루의 매화나무를 찍어 버렸다. 이유는 군더더기없이 간단하다. 추위가 이미 지난 후에 피는 춘매(春梅)였기 때문이다. 한매(寒梅)만이 매화라고 이름할 수 있다는 꼬장꼬장한 그의 기질 탓이였다. 매화는 매화다워야 매화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준 셈이다. 사실 겨울 속의 매화이기 때문에 매화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였다. 다른 꽃들과 함께 피는 매화는 이미 매화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는 것이 그의 행동 정당성 근거였다.
‘어떤 것이 너의 본래모습인가’하는 물음 매화에 빗대기도
‘남쪽가지에는 꽃이 피었는데 북쪽가지에는 꽃이 피지 않았다(南枝開花 北枝未開)’는 고사성어는 중국의 대유령(大庾嶺)이 무대이다. 말할 것도 없이 주어는 매화다. 그래서 매령(梅嶺)이라고도 불렀다. 이 고개를 경계로 춥고 따뜻한 기후가 확연히 구분된 까닭이다. 동시에 그 곳에서 겨울 끝 봄 시작임을 알리는 매화의 두 계절성과 양 지역성이 절묘하게 이중적으로 투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대유령은 호남성,강서성과 광동성의 경계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삼도봉 아니 삼도령(三道嶺)인 셈이다.
중국의 매령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인들 글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규보는 ‘추위 덮힌 유령(庾嶺)에 언입술 얻어터져도/연지와 분으로 천진을 잃지않았다...
눈을 맞고도 천송이 눈으로 또 단장하고/ 앞질러 봄을 한번 꾸미네’라고 했고, 김시습도 ‘한 쪽 가지는 시들고 마르는데/ 다른 가지에는 꽃이 피는구나’라고 했다
두 가지를 함께 보는 그들의 기질처럼 매화를 빌어와 겨울과 봄의 양쪽을 같이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 탁월한 균형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유명한 대유령 매화는 나옹(1320~1376)선사가 관리 이제현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온다. ‘…일전에 대유령 매화를 올리면서......’
물론 ‘헌화가’처럼 꽃을 올렸다는 말이 아니다. 대유령에서 육조혜능선사가 말한 ‘어떤 것이 너의 본래모습인가’하는 화두를 매화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사족을 단다면 그에게 지난 번에 준 ‘본래면목’ 화두를 가지고 참선 잘하고 있느냐고 에둘러 말한 것이다.
아름다운 봄날, 매화 피는 것을 보면서 현재 건건마다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좌(左)와 우(右)가 함께 살 수 있는 지혜로운 중용의 눈을 뜨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누구인가’하는 의문까지 동시에 던져 자기의 본래모습도 함께 살펴야 할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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