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님 글방/원철 스님] 의상대 일출
정철도 의유당 김씨도 일출 놓칠까 ‘안절부절’
화마도 태우지 못한 굳은 의지와 희망 ‘해오름’
낙산사의 객실 취숙헌에 여장을 풀었다. 송진냄새가 아직 채 마르지도 않는 새로 지은 한옥이다. 구석구석에 만든 이의 정성이 켜켜이 쌓여 있고 그 정성이 눈에 보일 만큼 제대로 만들어진 명품 요사채다. 장거리를 달려간 탓에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인지라 새삼 제 시간에 일어날 수 있으려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래도 아침에 꼭 일출을 보리라고 다짐하면서 애써 잠을 청하는데 낯선 방이라 정신은 계속 해말갛다.
부지런해야 일출도 그릴 수 있어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1536~1593) 역시 〈관동별곡〉에서 ‘해돋이를 보려고 한밤중에 일어났다’고 했고 의유당 김씨도 〈동명일기〉에서 ‘행여 일출을 보지 못할까 노심초사했다’고 했다. 천오백년 그 이전부터 유사이래 이 자리도 흐리고 눈비 오는 날을 제외하곤 매일 해맞이가 이루어졌겠지만 그 일출 역시 아무나 볼 수 있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음을 야무지게 다져 먹어야만 가능한 한 일인 탓이다. 하긴 따지고 보면 해 뜨면 나가서 일하고(日出而作) 해지면 들어와서 쉬는 것(日入而息)이 보통사람의 일상이다. 사실 호들갑 떨 일은 아닌 것이다. 해가 뜨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느냐만 그래도 빼어난 일출을 만난다는 건 참으로 귀한 일이다.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1676~1759)과 단원 김홍도가 ‘낙산일출’ 그림을 남겼다. 이 사실만으로 이 지역 일출이 빼어나다는 증거로 삼을 만하다. 사실 해돋이 그림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흔치않은 건 안 그린 게 아니라 못 그린 것이다. 왜냐하면 새벽 해돋이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큰 의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정신력 강하고 부지런한 겸재 정도나 되어야 남길 수 있는 그림이라고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말한다.
평일 낮엔 국수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는 인심 후한 다래헌
양양(襄陽)이란 지명 자체가 ‘해오름의 고장’이라는 말이다. 제주 성산포 근처 신양(新陽)도 ‘가장 먼저 해가 비치는 곳’이라는 말에서 연유한다. 중국은 태산일출이 유명하다. 모택동은 그 일출을 보고 ‘동방은 붉다(東方紅)’고 평했다고 한다. 한국은 낙산일출이 유명하다. 매월당 김시습도 여기를 최고로 쳤다. 세상 사람들도 관동팔경 중 제일의 자리에 두었다. 그래서 고은 시인은 양양 낙산사가 아니라 동해 낙산사로 말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잿더미 뒤의 복원된 절에서 맞이한 정월의 일출이라 더욱 황홀하다. 사실 일출 자체가 희망이 아니라 일출을 보는 사람이 희망을 만들기 때문에 해맞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의상대는 해 뜨는 것 감상을 위한 화룡점정의 명당자리에 있는 정자다. 2005년 봄 모든 이를 안타깝게 했던 큰 화재마저 피해간 건물답게 그 역사가 만만찮다. 신라 때 낙산사 창건 후 5년이 지난 시점에 처음 세워졌다. 하지만 나무집이라 없어지고 또 새로 세우기를 반복했다. 1926년 만해 한용운 스님이 머물 때는 이 정자가 없어진 시기였다. 시인은 일출을 바라볼 정자가 없어진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다시 복원했다.
의상대의 낙산일출은 매년 새해아침이면 오천명의 인파가 해 뜨는 것을 보러오는 곳이다. 올 설날 아침에도 다래헌에서 떡국 4천그릇을 대접했다. 모두 여기서 한 살씩 더 먹고 가셨다. 평일에도 언제나 낮에는 국수를 얻어먹을 수 있는 인심 후한 절집이기도 하다. 나 역시 지난해 12월 왔을 때도 따뜻하고 깔끔한 맛의 국수 한 그릇을 선 채로(앉을 자리가 없었다) 비웠다.
노자(老子)가 후학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 일출을 보고 있었다.
한 제자가 이 광경이 너무도 감동적이라 소리를 질렀다.
“너무 아름답다.”
노자는 다른 제자에게 말했다.
“다음부턴 그 놈은 데리고 오지 말아라.”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하는 것은 수다스런 일이다. 그래서 일출찬탄도 눈치껏 이만큼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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