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벗님 글방/원철 스님]   소박한 절에 일부러 화려한 꽃 심은 뜻은…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지대가 높은 탓에 무슨 꽃이든지 한 박자 늦게 핀다. 더위가 시작될 무렵에야 작약꽃을 볼 수있다. 산문을 걸어 잠근 채 그림자 마저 일주문 밖을 향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정진하는 여름 안거가 반쯤 지난 어느 날 오후, 밀짚모자를 눌러쓴 채 온몸에 나른함을 안고서 산책길을 나섰다. 볕에 달구어진 암자의 뜨거운 마당 한켠에 만개한 작약꽃 앞에 한순간 그대로 꽂힌 듯 멈춰 섰다.   홍제암 사명대사 영당 앞의 작약은 그날 따라 유독 붉었다. 축대 밑에서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기죽지 않는 꽃잎을 마주하니 더위에 지친 두 어깨에 슬며시 힘이 솟는다. 넓고 푸른 잎의 바탕색깔 때문에 꽃은 더욱 원색적으로 보였다. 어찌보면 고인들은 단아하고 소박한 절마당에 어울릴 것 같지도 않은 화려한 작약을 일부러 심어놓은 그 깊은 뜻은 이 여름에사 읽어낼 수 있었다.    송나라 때 구양수는 ‘낙양모란이 천하제일(洛牧丹甲天下)’이라고 했다. 낙양에 있는 사찰도 예외는 아니였다. 중국 최초의 가람인 백마사와 손오공의 주인인 현장법사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자은사는 중원(中原:중국)의 모란 명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절집 뜨락에는 부귀영화라는 이미지의 모란은 차마 심을 수 없었던지 작약으로 대신해 놓은 것 같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게 작약이 아니라 모란인줄 알았다. 그리고 모두가 ‘모란’이라고 불렀다.   백련암 앞뜰 작약꽃 앞에서 빳빳하게 풀먹인 광목옷 차림새로 작은 미소를 짓고있는 성철스님의 모습을 사진작가 주명덕 선생은 영상으로 남겨 놓았다. 세존께서 대중들에게 말없이 꽃을 들어보이자 가섭존자가 이심전심으로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혼자 빙그레 웃었다는 ‘염화미소’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붉은 꽃과 회색 옷의 대비는 또다른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오래 머물렀던 퇴설당에 여름이 오면 담장 아래 소담스런 작약은 당신이 없어도 여전히 그 꽃잎을 드리우고 있다.   당나라 때 남전선사는 ‘사람들은 이 한 그루 모란 꽃을 마치 꿈결처럼 바라본다’고 했다. 나 역시 보이지도 않는 해인사 작약꽃을 종로도심에서 꿈결처럼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그 때 그 꽃이 모란인지 작약인지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하긴 모란인지 작약인지 그게 뭐 그리 대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