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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사대문 언저리 비구니 도량 네 곳을 아시나요?

등록 2008-04-07 16:49

[벗님 글방/원철 스님]

왕을 여의거나 나이가 찬 후궁들 마음 달래줘

서울 한복판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게 경이  

얼마 전에 불타버린 남대문을 중심으로 한 도성 안은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아무나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왕족이나 사대부만의 거처였다. 지금도 종각근처에 신축한 오피스텔과 빌딩의 광고문은 ‘왕가의 명당’이란 문구가 절대로 빠지는 법이 없다.   남대문 앞에서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것과 같은 이치   하지만 정작 본래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 사실조차도 잊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중국 속담에 ‘함원전 앞에서 장안이 어디냐고 묻는다’고 했다. 남대문 앞에서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다. 진짜 서울 토박이는 서울을 잘 모른다. 알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도리어 이긴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하긴 지방 사람이 서울지리에 더 밝을 수밖에 없으니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당나라 황궁인 장안성 대명궁의 함원전이라는 이름은 조선의 한양 경복궁 안에도 있었다. 경회루와 교태전 사이에 소재했다고 한다. 조선 세조 12년에 지금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원각사에서 백옥불상을 조성하였는데 함원전으로 맞아들여 점안법회을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그러고 보면 불교와 관계 깊은 궁궐 내 전각인 셈이다. 내불당 역할을 겸했던 것 같다.《벽암록》 50칙에서 ‘함원전  앞에서 장안이 어디냐고 묻는다’는 말에서 보듯 다른 건물도 많았을 텐데 굳이 함원전을 인용한 것은 결과적으로 조선 땅에서는 우연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역시 선종의 정맥을 이은 집안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옥수동 미타사, 석관동 청량사, 숭인동 청룡사, 보문동 보문사   얼마 전에 사대문 바깥 언저리의 비구니 도량 네 곳(문헌에서는 이를 묶어서 사니사(四尼寺)라고 기록했다)을 둘러보게 되었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역사적인 고찰들이, 그것도 왕실의 안주인과 후궁 내지는 상궁들과 인연이 깊은 절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경이로움이었다. 서울에서 오래 살았고 시내 답사에 관심이 많은 마니아를 제외하고는 이 절들을 모두 밟아 본 사람은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 같다.   사니사(四尼寺)는 옥수동의 두무개 승방(현 미타사), 석관동의 돌곶이 승방(현 청량사), 숭인동의 새절승방(청룡사), 보문동의 탑골승방(현 보문사와 미타사)이 그것이다. 청량리 청량사 안내현판에는 청량사 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곳까지 함께 열거하고 있는 넓은 아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동문밖 비구니 도량은 왕을 여의거나 나이가 찬 후궁들이 마음 둘 곳이 없어  방황할 때 이곳의 문을 활짝 열어 그녀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준 곳이기도 했다. 내세의 자신에 대한 기복과 왕에 대한 사모의 마음이 어우러진 그런 기도처였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갈 때 왕후와 마지막 이별한 곳   공통점은 먼지 한 점 없이 정갈하다는 것과 같은 영역에 살면서도 각 전각마다 살림을 따로 한다는 것(정화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찰 살림살이가 이렇게 이루어졌다)과 모두가 유치원을 경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산 위까지 올라간 아파트촌 사이에서 기도와 수행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긴 세월동안 무던히도 애쓴 흔적이 곳곳에서 읽혀진다.   청룡사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갈 때 정순왕후 송씨와 우화루에서 마지막 이별을 한 곳이라고 한다. 이후 희안, 지심, 계지 세 시녀들과(이름으로 미루어 보건대 법명인지라 모두가 비구니였을 것이다) 함께 살면서 64년 동안 왕의 명복을 빈 곳이다.   특히 이곳에는 왕이 승하하면 후궁들이 궁궐을 떠나 선왕의 명복을 빌며 죽을 때까지 기거하던 곳이었다는 정업원(淨業院)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업을 맑히는 곳’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그녀들은 늘 내세를 기약했다. 나머지 세 군데 절도 거의가 중창 중건주가 왕실의 여인네들이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비구니로 출가하여 살았다는 기록도 함께 전한다. 모두가 도심사찰로는 그 규모가 만만찮다.    통 큰 비구니가 선방 앞에서 당당하게 한마디   유주(幽州) 땅의 담공(譚空)선사는 개당(開堂)하려는 비구니에게 한마디 던졌다.

“그대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으니 개당치 말라.”

그러자 비구니가 말했다.

“용녀의 성불에도 다섯 가지 장애가 있었습니까?”   동산양개선사의 회상에서 있었던 일이다. 통 큰 비구니가 선방 앞에 와서 말했다.

“이렇게 많은 무리가 몽땅 내 자식들이로다.”   보문사는 이미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 보문종으로 독립하여 개당했고, 담장을 사이에 두고 연이어져 있는 미타사는 현재 조계종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당당한 비구니들이 있기 마련인가보다. 도심 가운데 있으면서 한낮인데도 네 곳의 비구니 절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당나라 때 왕창령(王昌齡 698~756)은 ‘제승방(題僧房)’이라는 선시를 통해 이런 분위기를 누구보다도 잘 표현하고 있다.

  종려화만원(棕櫚花滿院)하고 

 태소입한방(苔蘇入閑房)이라

 피차명언절(彼此名言絶)하니

 공중문이향(空中聞異香)이라

 종려나무 꽃은 담장 안에 가득 피어 있고

 돌이끼는 한갓진 방안으로 들어올 듯하네.

 피차가 서로 말이 없어 더욱 고요하니

 허공에는 천상세계의 향내음이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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