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님 글방/원철 스님] 개성을 다녀와서
지명이 주는 선입견은 시간까지 오해하게
남녀의 자아실현 방식, 통념과 전혀 달라
개성의 대표적 관광지인 선죽교.
지난 5일 새벽 여명을 뚫고 우리 일행은 단체버스로 서울을 떠나 개성으로 향했다. 금강산을 몇 번 다녀온 경험 덕에 북측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절차는 이제 비교적 익숙한 편이다. 선죽교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 속의 그 다리는 유명세에 비해 규모가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어릴 때 국사시간에 들었던, 자객이 다리 밑에 숨어 정몽주를 기다렸다는 야사 때문에 만들어진 잠재의식이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해버린 탓이리라. 개울도 얕고 좁았으며 다리 길이 역시 6미터 남짓했고 폭은 2미터를 조금 넘었다. 그 옛날 이 개울은 어른 몇 명이 숨을 수 있을 정도로 깊었는지 모르겠지만.
“돌에도 신라 돌이 따로 있나”
개성은 고려의 오백년 도읍지었다. 경주나 부여 혹은 오래된 역사를 가진 도시를 지날 때 받는 느낌이 여타 지역과 다른 것처럼 송도의 땅기운 역시 그랬다. 송악산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해방 무렵에는 3.8선 이남이었고 현재는 휴전선 이북이 되어버렸다. 남-북을 동시에 체험한, 현재인구 40만 규모의 적다고 할 수 없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 이력 때문에 이제 남쪽 관광객들까지 공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이 길러졌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해본다.
정몽주(1337~1392)는 고려인이지만 이른바 ‘송도삼절’의 주인공 황진이는 조선시대 사람이다. 개성이 배경이라 모두가 고려시대려니 했다. 지명이 주는 선입견은 시간까지 착각하도록 만든다. 선죽교에 대한 공간적 넓이의 기대만큼이나, 길었던 시간의 후광 역시 모든 걸 오해하도록 만든 힘이었던 것이다. 이것도 오랜 단절의 결과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언젠가 도반을 따라 도량의 앞마당을 장식할 석물을 사러 갔다.
경주의 어느 골동품 가게에 들렀을 때 주인장의 재미있는 말이 생각났다.
“스님! 이 돌은 신라 돌(石)입니다.”
혼자서 그 말을 받아 되뇌었다.
“신라 돌이라……. (지구가 생기면서 이 돌이 만들어졌을 텐데)”
“진리에 어찌 남북이 따로 있나”
황진이와 정몽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비된다. 먼저 여성과 남성이라는 차별성이다. 두 사람은 봉건적 가치관이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보수적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남녀의 자아실현 방식이 통념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정몽주는‘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가 아니라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는 참으로 여성스런 분위기의 시를 남겼다. 그리하여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다가 결국 선죽교에서 최후의 피를 뿌렸던 것이다.
하지만 꺼릴 것 없는 기질의 소유자 황진이는 길 가는 남정네 등 뒤에서 ‘명월이 공산에 가득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라는 시를 우아하게 읊조려 결국 그를 말에서 내리도록 했다. 또 ‘백 명의 낭군이라 한들 어찌 모두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는지 온갖 염문을 뿌리고 다녔던 것이다. 그녀가 머리채를 붓으로 삼아 썼다는 글씨가 박연폭포 곁의 바위섬에 남아 있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죽은 후에도 평안부사로 부임하던 백호 임제(1549~1587)로 하여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서러워 하노라’라는 내용으로 자기를 연모하는 시까지 짓도록 만들었다. 사대부가 기생의 묘를 지나가면서 참배하고 시까지 지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평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해임장이 와 있었다고 전한다.
그녀가 좋아했던 박연폭포 위 관음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위치한 소박하고 단아한 절이었다. 가사를 둘렀지만 머리카락은 긴 북측 승려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처음 따라 온 일행은 그들의 삭발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서 생경해 하였다.
당나라 때 조주 종심(778~897) 선사는 사세(寺勢)가 매우 미약한 북쪽지역인 하북성에 살았다. 그 무렵 수천리 떨어진 남쪽지방 복건성 설봉산은 선불교(禪佛敎)가 한창 교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불원천리하고 선사를 찾아온 젊은 수행자에게 조주는 말했다.
“그대는 여기까지 올 필요 없다. 진리의 가르침은 모두 남방에 있다.”
그러자 그 학인은 도리어 이렇게 대꾸를 했다.
“진리에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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