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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한국판 모세 김약연

등록 2007-06-13 16:00

(17) ‘한국판 모세’ 김약연 선생

해방의 등불 된 ‘간도의 대통령’
  간도에도 명동이 있었다. 서울의 명동처럼 화려하지 않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하지만 ‘동쪽, 즉 조선을 밝힌다’(明東)는 그 이름대로 조국의 내일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던 땅, 그곳이 바로 명동촌이었다. 나라가 망해가던 때에 국내에선 남강 이승훈 선생이 평북 정주에 용동촌과 오산학교라는 이상촌을 세워 미래를 준비했다면 간도에선 규암 김약연(1868~1942) 선생이 한민족기독교공동체인 명동촌을 세워 민족의 앞날을 밝혔다.

» 어린시절 김약연같은 인물이 되고 싶어 목사를 지망했다는 문동환 목사가 김약연을 회고하고 있다. 구한말 북간도 이주해

한인거주지 조성

명동학교 지어 독립지사 양성

“내 삶 자체가 유언”남겨
  그곳 명동촌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미국에 살면서 잠시 귀국한 문동환(86) 목사를 만났다. 문익환 목사의 동생인 그는 자신이 목사가 된 것은 김약연 선생 때문이었다고 했다.   “여덟살 때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을 아주머니들과 교회에 가다가 아주머니들이 ‘넌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김약연 선생이었어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고, 모든 이들이 존경하는 그 분이 목사였기 때문에 나도 목사가 되겠다고 했지요.”   문익환·문동환의 부모로 국내외에서 수많은 종교인들과 명사들을 만났던 문재린·김신묵도 자서전인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에서 평생 만나보고 상종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생각만 해도 언제나 머리가 숙여지고 마음으로 흠모하는 분 가운데 첫 번째로 김약연을 들겠다고 했다.

김약연은 종교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돕고 껴안는 포용력과 인격으로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김약연은 함북 회령의 유가적 가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유학 경전에 통달했다. 그의 스승은 도포도 안 입고 관도 안 쓰고 그냥 검은 천 뭉치 비슷한 것을 머리에 쓰고 제 손으로 더덕더덕 기운 옷을 입고 다녀 백결선생으로 불렸던 남종구 선생이었다. 그 스승도 김약연을 일찍부터 보통이 넘는 사람으로 인정했다.   김약연이 고향 사람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은 것은 1899년 2월이었다. 구한말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관리들의 부패와 타락과 민중 수탈이 심해지자 김약연은 문재린의 증조부, 장인인 문병규, 김하규의 가솔 등 142명과 함께 북간도 화룡현 불굴라재로 이주를 감행한다. 본래 우리 조상인 고구려인들의 땅이므로 개간해 우리 땅을 만들어보자는 웅지를 품은 김약연은 땅 수백정보를 사들여 개간해 한인집단거주지를 조성했다. 그는 바로 한국판 모세였다.   그는 1901년 곧바로 규암재라는 서당부터 지어 교육을 시작했다. 규암재가 서전서숙으로 발전하고 서전서숙이 1909년 명동학교가 되었다. 명동학교에서 문익환, 윤동주, 나운규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와 우국지사들이 자랐고, 일제의 탄압으로 명동학교가 문을 닫고 1930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합쳐진 뒤에도 안병무, 강원용, 문동환 등과 같은 인재가 나왔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명동학교에 초대된 교사 정재면에 의해서였다. 유학의 대가인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정신을 새롭게 개혁하지않고서는 민족을 살릴 수 없다는 민족지도자로서의 결단이 숨어있었다. 1915년 장로가 되고 29년 목사 안수를 받고 간도의 기독교계 지도자로 떠오른 김약연은 신학을 배운 일이 없음에도 성서 해석에 탁월했다.   명동학교와 은진중학교 이사장이자 목사이며 민족의 지도자였지만 김약연은 말로써 남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경모의 마음을 감추지 못한 것은 솔선수범하는 그의 삶 때문이었다. 그는 명동학교 교장일을 보면서도 일꾼조차 두지 않고 1천 평쯤 되는 밭농사를 지었고, 가을에는 농군들과 함께 밤을 새워 타작을 했다.   또 골짜기 땅을 사서 동생과 함께 개간을 했다. 유가적 인격과 가풍, 기독교적 공동체성과 이웃 사랑이 어우러진 김약전의 영성이 빛을 발한 명동촌엔 만주와 함경도 곳곳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국내에서 피신해 온 애국지사들은 선생으로 강단에 서서 수많은 독립지사들을 길러냈고 이들은 훗날 해방 조국을 밝히는 등불들이 됐다.   신앙과 민족애로 무장한 명동촌에선 비밀이 새어나가는 법이 없어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가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이토오 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안중근이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부 당한 뒤 김약연을 찾아와 몰래 권총 연습을 한 곳도 명동촌의 뒷산이었다.   그가 조국 해방을 3년 앞두고 선종할 때 울던 가족과 제자들이 유언을 부탁하자 “내 삶이 유언이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서시〉를 남긴 윤동주는 김약연의 누이동생의 아들이자 그가 가르친 제자였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울림 - 우리가 몰랐던 이땅의 예수들>(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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