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살아있는 예수’ 장기려 박사 병든 빈민 보살핀 ‘한국의 슈바이처’
부산은 평양에서 1·4 후퇴 때 둘째아들만을 데리고 피난온 장기려(1911~95) 박사가 북에 두고 온 부모와 부인과 다섯명의 자식을 그리면서 45년을 독신으로 보낸 곳이다.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김일성의대에서 교수를 했던 그는 19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 절제 수술에 성공하는 등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로 손꼽히는 존재였다.
그는 또한 슈바이처 못지않은 자선가였다. 의사가 되기로 했을 때부터 평생 의사 얼굴 한 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한 장기려는 평생 집 한 채 없이 부산복음병원 옥탑방에서 살면서 그의 정성으로 완쾌해 새 생명을 얻고도 수술비가 없어 퇴원하지 못하는 환자들의 수술비를 자기 월급으로 다 대주곤 했다. 그로 인해 장기려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병원 재정에도 타격이 컸다. 그러자 병원에선 입원비 지원 결정을 원장 혼자 내릴 수 없게 했다. 그 이후 장기려는 돈 없는 환자들에게 뒷문을 열어놓을 테니 몰래 도망가라며 살짝 문을 열어놓곤 했다. 그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진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에서 작가가 “당신은 성자 아니면 바보요”라고 물을 만큼 그는 바보스러웠다.
부산 복음병원 옥탑방에 살며 의술 베풀어 북한가족 그리며 독신생활…평생 무소유 삶
하지만 이 모든 것으로도 장기려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은 그를 ‘살아 있는 예수’로 기억한다. 병원 근무자들의 가족들을 모두 합쳐 월급을 똑같이 나누는 바람에 운전기사와 같은 월급을 받을 만큼 기득권을 내려놓고 평등한 세상을 실현하려 했던 그를 종교나 교단이나 교리적 도그마 같은 기득권도 가둘 수는 없었다. 그는 예수를 신격화하고 대상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예수와 같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70년부터 75년까지 복음병원에서 수련의로 근무했던 부산 서면복음외과 최중묵(76) 원장을 찾았다. 부전동 번화가에 있지만 허름한 건물에서 흰 가운을 입고 환자들을 돌보는 그는 자상한 동네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는 가톨릭 신자다. 그럼에도 장기려가 좋아 복음병원에서 근무했다. 복음병원의 운영 주체였던 고신 교단 목사들이 “왜 우리 신자가 아닌 가톨릭 신자를 수련의로 받아주느냐”고 했지만, 장기려는 종교가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불교든, 또 고향이 이북이든 경상도든 전라도든 개의치 않았다. 어떤 식의 편가르기와도 그는 애시당초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일부 의사들이 장기려를 몰아내고 복음병원의 이사장직을 차지하려 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젊은 수련의들은 분노했다. 그것이 폭력 사태로 번졌고, 생전 싸움이라곤 모르고 살았던 최중묵도 폭력 사건에 연루돼 2개월 형을 받았다.
그때 장기려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던 부산고검 검사장은 별일 아니니 구속된 의사들을 곧 내보내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런데 장 박사는 병원엔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해버렸다. 그러자 반대쪽에서 폭력 연루자들이 석방될 수 없게 해버렸다.
“그래서 형을 살게 됐지요. 장 박사님은 그만큼 순진하고, 도무지 비밀이라는 게 없었어요. 사심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정치적인 술수 같은 건 아예 몰랐지요. 장 박사님 말 때문에 검사장도 목이 날아갈 뻔했지요.”
최중묵은 장기려를 지켜주기 위해 나섰지만 장기려로부터 칭찬을 듣기는커녕 감당키 어려운 꾸중을 들어야 했다. 장기려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사용해선 안 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했다. 오히려 상대방은 껴안으면서도 자기를 역성든다고 나섰던 사람들에겐 그토록 무섭게 질책했다. 이해타산과 편가르기에 물든 사람들에게 장기려는 별종이었다. 그런데도 명절 때 윷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못하면 천국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은 그를 두고 한 말인 듯했다.
장기려는 평생 다녔던 기존 교회를 벗어나 완전한 무소유를 지향했던 ‘종들의 모임’에 함께할 만큼 기득권이나 장로로서의 직위나 시선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진실만을 추구했다.
정부 당국이 그에게 북에 가서 부인과 자식들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는 “이제 만나면 가족들과 헤어질 수 없다”며 “북한이 가족들을 남한에 내려보내줄 리 없을테니 나는 그곳에서 살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면 정부 당국이 그를 보내줄 리 만무함에도 그는 “거짓말은 할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고, 결국 북한행도, 그리던 가족과의 상봉도 이뤄지지 못했다.
그를 사모하며 수많은 여인들이 상사병이 나기도 했지만, 그는 끝내 부인 김봉숙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채 하늘에서 만날 것을 믿으며 선종했다. 부산/글·사진 조현 기자(한겨레신문 2007년 6월 5일)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울림 - 우리가 몰랐던 이땅의 예수들>(시작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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