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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순례기

15.조선의 어린 성자 방애인

등록 2007-06-12 18:46

⑮ ‘조선 성자’ 방애인고아·걸인 섬긴 ‘단벌의 천사’   
어느 날 길가에서 사람들이 정신병자인 한 노파를 에워싼 채 놀리고 있었다. 놀림을 받는 노파는 슬퍼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때 어여쁜 한 처녀가 눈물을 글썽인 채 그 노파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노파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노파를 희롱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구경꾼들도 처녀가 마치 어머니인 듯 노파의 손을 잡고 데려가는 모습을 보곤 감격의 눈물에 젖었다. 노파 앞에 나타난 천사는 방애인(1909~33)이었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3가 전주서문교회 역사자료실엔 〈조선 성자 방애인 소전〉이란 책자의 다양한 개정판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 3대 담임이었던 배은희 목사가 지은 책이다. 강순명 목사와 함께 독신전도단을 만든 창시자로서 그 자신도 성인의 풍모를 지녔던 배 목사가 감히 ‘조선 성자’라고 일컬었던 이는 이 교회 안팎에서 봉사활동을 벌이다 겨우 스물네 살로 생을 마감한 처녀였다. 

성령 체험후 기쁨에 넘쳐어렵고 힘든 사람 위해 헌신 고아원 열고 야학봉사 24살때 열병으로 생 마쳐

서문교회를 떠나 완산구 효자동의 전주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건물에 들어서니, 직영하는 어린이집에선 아이들이 명랑하게 뛰놀며 재잘대고, 사무실에선 동남아시아 출신 새터민들의 고충 상담이 이뤄지고 있다. 이곳에선 5년 전부터 ‘방 선생 본받기 운동’을 벌이고 있고, 올해부터는 ‘방애인 기념상’까지 제정했다. 이명자 사무총장은 “전주와이더블유시에이 초기 활동가인 방애인 선생의 뜻을 잇기 위한 활동들”이라고 말했다. 

애인은 황해도 황주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의여학교를 거쳐 개성 호수돈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열여덟 살에 전주 기전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해 전주에 왔다. 당시로선 으스댈만한 신여성이었지만 그는 겸손하고 성실했다. 그는 3년 만에 모교인 황주 양성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그러자 서문교회 1천여명의 교인이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했다. 애인은 “전주에 와서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이렇듯 눈물로 아쉬워하니 두렵기 짝이 없다”면서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성심을 다해 봉사할 결심을 했다. 그의 뜻대로 2년 뒤인 31년 9월 기전여학교 교사로서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애인은 2년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애인은 황주에서 살던 30년 1월10일치 일기에 “나는 처음으로 신의 음성을 들었다. 눈과 같이 깨끗하라 아아! 참 나의 기쁜 거룩한 생일”이라고 했고, 11일엔 “나는 어디로서인지 세 번 손뼉 치는 소리를 듣고, 혼자 신성회에 가다. 아아! 기쁨에 넘치는 걸음이다”라고 했다. 

그렇게 성령을 체험해 겉모습을 꾸밀 필요가 없을 만큼 마음이 부유해지고 기쁨에 넘쳤던 것일까. 부잣집 딸과 신여성 처녀로서 단장하던 값진 옷감도, 향수와 크림도 그의 소지품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단 한 벌의 옷뿐이었다. 

32년 여름엔 수재가 발생해 이재민들이 전주 다가공원에 밀려들었다. 이들은 가을이 돼 찬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자 친인척이나 지인의 도움을 받아 하나둘씩 떠나갔다. 오직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한 가족만이 그곳을 떠나지 못한 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애인은 이를 보고 자신의 필수품인 시계와 만년필을 팔아 셋방을 얻어주었다. 

전주엔 그나마 그런 부모조차 없이 거리에 방치된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애인은 그런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을 짓기 위해 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전주 시내 8천여호를 가가호호 방문해 한 푼 두 푼씩 모아 마침내 고아원을 열었다. 방학이 돼도 고향집에 돌아가지 않고 전주 교외 시골에 야학을 열어 글을 깨치지 못한 농촌 여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던 애인은 한밤중에 돌아오면서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을 찾아 들쳐업고 오곤 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깎아주고 검은 때가 덕지덕지 낀 아이를 목욕시켰다. 얇은 옷 단벌로 겨울을 나는 딸이 안타까워 어머니가 보낸 솜옷도 입어보지도 않은채 모두 거리의 걸인들에게 주었다. 

애인은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길거리에서 무뢰배들이 무섭게 싸울 때 어떤 사람도 그 앞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애인은 두려움 없이 다가가 눈물과 온유한 목소리로 기도하고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면 뭔가에 홀린 듯 싸우던 이들이 웃으며 악수하곤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열병을 얻어 숨을 거두자 전주 시내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던 배은희 목사는 애인의 전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세상을 비관하는 성자가 아니요, 세상을 낙관하는 성자였다. 그는 스승이 되려는 교만한 성자가 아니요, 형제의 발아래에 엎드려 겸손히 섬기는 성자였다. 그는 죄인에 대한 책망의 성자가 아니요, 죄인에 대한 눈물의 성자였다.” 전주/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겨레신문 2007년 5월 29일)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울림 - 우리가 몰랐던 이땅의 예수들>(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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