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김교신 선생 청년 손기정 가슴에 민족혼 지핀 스승
서울 중구 만리동2가 손기정 기념공원. 목동으로 옮겨간 양정고등학교 터에 자리잡은, 잘 꾸며진 공원이다. 봄의 정취를 만끽하며 산책하는 사람들 곁을 지나니 일제 때 만들어진 빨간 벽돌 건물이 있고, 그 옆엔 양정고 재학 도중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흉상이 서있다.
당시 손기정을 키운 것은 교사 김교신(1901~45)이었다. 김교신이 가르친 것은 마라톤만이 아니었다. 일본어로만 수업을 하게 하고 한국말로는 사담조차 못하게 했던 그 시절, 그는 배짱 좋게 학생들에게 한국말로 한국 위인들의 얘기를 들려주며 좌절한 식민지국 청년들의 가슴에 희망의 불씨를 심었다. 김교신과 함께 도쿄에 가서 베를린 올림픽 예선전을 통과했던 손기정은 훗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스승의 눈물만 보고 뛰어 우승할 수 있었다”고 했다.
‘조선의 기독교’로 민족구원 뜻 식민지 청년에 사명감 불어넣어 강제징집 노무자 돌보다 병사
김교신은 함경도의 유교 전통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네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918년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가서도 인륜을 저버린 일제의 폭력과 이에 신음하는 고국 동포의 모습에 비탄에 빠져 있던 김교신은 기독교에서 동포를 살릴 구원의 희망을 찾았다. 부정의를 보고도 아무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증거라고 한 공자의 말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예수가 부정의를 보고도 아무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한 것을 보고 예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처음 갔던 교회의 목회자가 교권에 의해 쫓겨나는 것을 보고, 교회나 교권의 틀에 왜곡되지 않은 그리스도를 갈구하다 1921년부터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회에 출석해 7년간 성서를 배웠다. 그는 이때 함께 배운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 등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었고, 귀국 후 〈성서조선〉이란 잡지를 내 조선 민중을 흔들어 깨웠다.
당시 〈은둔의 나라 조선〉을 쓴 미국 선교사 윌리엄 그리피스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으로 서구에 소개했고, 일제와 친일사학자들은 우리 역사와 민족이 한심하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김교신은 ‘무레사네’(물에 산에)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주일마다 서울 근교의 고적과 명소를 심방하고 참배하면서 청년들에게 우리 국토와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화적 탁월성을 발견하게 했다. 역사와 지리 선생인 그는 한반도를 “물러나 은둔하기는 불안한 곳이지만, 나아가 활약하기는 이만한 데가 다시 없다”며 움츠린 청년들의 어깨를 활짝 펴게 했다.
김교신은 청년들에게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몇 천년에 걸쳐 이 땅에 터 잡고 영고성쇠의 역사를 경영해온 우리 민족의 섭리사적 사명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것을 외국의 신학자가 다듬어 줄 것인가, 외국의 역사가가 알려줄 것인가”라며 우리 스스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약이 아니라 이 땅의 ‘구약’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접목하려 했다.
그는 자기중심적인 탐욕의 성취를 위해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복적인 서구의 기독교적 모습을 비판했고, 미국 기독교를 모방해 격정적이고 반지성적인 풍조에 빠져 있던 기독교인들에게 찬물을 끼얹어 이성적 신앙을 갖게 했다. 그는 ‘미국이나 일본의 기독교’가 아니라 은근하고 담박한 조선인의 심성과 동양 정신의 진수라는 그릇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담은 ‘조선의 기독교’를 열고자 했다.
전원생활을 즐겼던 김교신은 북한산 산골 정릉에서 살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찬물 마사지를 하고서 소나무 숲 속에 들어가 기도한 뒤 텃밭을 가꾸었고, 늘 자전거를 타고 학교까지 다녔다. 8남매 아버지이기도 했던 김교신은 폐간과 감옥행을 전전하면서 불굴의 의지로 혼자서 시간과 비용을 모두 들여가며 〈성서조선〉을 만들었다.
1년의 옥살이를 끝내고 43년 출옥한 김교신은 조선 노무자 5천명이 강제 징집 당해 일하던 흥남 일본질소비료에 몸소 들어가 유치원, 학교, 병원 등을 세우고, 궤짝 같은 집에서 살며 떨고 지내는 노동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45년 4월 발진티푸스가 만연하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병에 걸린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돌보다 감염돼 목숨을 잃었다. 그가 〈성서조선〉을 통해 어두운 밤하늘에 대고 수십년간 닭울음소리로 알렸던 해방의 첫새벽을 100여일 앞둔 때였다. 그의 나이는 불과 45살이었다.
공원엔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우승으로 타 온 것을 김교신이 심은 월계수가 그가 사랑한 조국과 하나님을 이어주듯 하늘 높이 솟구쳐 있다.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겨레신문 2007년 3월 28일자)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울림 - 우리가 몰랐던 이땅의 예수들>(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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