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남강 이승훈 “나라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서울 용산구 보광동. 남산의 품에 안긴 오산중고교를 한강이 휘감아 돈다. 3·1운동 때 기독교 대표였던 남강 이승훈(1864~1930)이 세운 학교다. 남강문화재단 상임이사이기도 한 오산고 이신철(58) 교장선생님이 ‘겨레의 스승’ 남강을 전한다. 6·25 뒤 서울로 내려온 오산학교는 애초 1907년 남강이 평북 정주의 제석산 기슭에 세웠다. 올해가 100돌이다. 처음 7명의 학생으로 시작해 기껏해야 전교생이 100명 남짓이었던 이 학교 출신의 교사와 학생들을 살펴보면, 한 사람이 심은 밀알이 얼마나 창대한 결과를 낳는지 그저 놀랄 뿐이다. 고당 조만식,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 다석 유영모, 함석헌,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소설가 염상섭, 벽초 홍명희, 시인 김소월, 화가 이중섭 등이 오산 출신이고,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호랑이굴에 고양이 새끼는 없다고 했던가. 멀리서 남강이 나타나면 “범(호랑이) 온다, 범 온다”고 숨곤 하던 오산의 자식들이 남강의 품을 떠날 때가 되면, 식민지의 비참하고 무력한 낭인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야성과 웅혼을 되찾은 호랑이였다.
종파에 휘둘리지않은 신앙으로 민족과 일심동체인 기독교 키워오산학교 세워 ‘겨레 스승’으로
남강은 상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더구나 8개월 만에 어머니가 눈을 감아 할머니 손에 자랐으나 열 살 때는 할머니와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 천애고아가 되었다.
남강은 곧 상점에 잔심부름을 하는 사환으로 들어갔다. 특유의 성실과 정직성으로 인해 주인의 눈에 들어 자리를 잡은 그는 열다섯 살에 혼인을 하고, 스물네 살엔 주인의 가게와 유기공장을 넘겨받았는데 처음부터 노동자들을 한 가족으로 대해 그의 일터는 기쁨으로 충만했고, 마침내 큰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서른한 살 때 청일전쟁으로 그동안 쌓아온 부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남강은 재기해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국제무역상이 되었다. 하지만 마흔한 살이던 1904년 터진 러일전쟁으로 큰 실패를 겪고 말았다.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조약마저 맺어져 나라 잃을 위기마저 닥쳐 방황하던 1907년 남강은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게 되었다. 도산은 “사람은 제가 자기를 업수이 여긴 후에야 다른 사람이 업수이 여긴다”고 했다. 남강은 먼저 단발, 금주, 금연을 결행하고, 민족을 깨우기 위해 고향 향교에 강명의숙을 세웠다. 4개월 뒤엔 ‘서당’ 대신 신학문기관인 오산학교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시대는 더욱 암울해져 ‘국치’로 치닫고 있었다. 남강은 1909년 9월 평양에서 한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목사는 이 고난의 땅만 있는 게 아니므로 하늘을 보며 어려움을 이겨나가자고 호소했고, 섬김과 사랑, 평등의 기독교정신을 설파했다. 남강은 무력하고 분열된 민족을 구원할 사상으로 이를 받아들였고, 오산학교를 기독교학교로 바꾸었다. 남강은 이후 일제가 민족지도자들을 붙잡기 위해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5년간 온갖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르는 동안 신약성경을 100독해 내면의 신앙을 반석에 세웠다.
육신이 크게 상한 채 옥고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감옥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3·1 만세운동이었다. 그는 “안방에서 편히 죽을 줄 알았더니 이제야 죽을 자리를 얻었구나”라고 했다. 그러나 장로교계 중심 지도자들이었던 길선주, 손정도, 신흥식 목사 등은 신중론을 폈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은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앉아 있을 수가 있느냐?”
남강의 일갈이 없었다면 평양대부흥의 기세도 사그라들어 여전히 서양의 이방 종교에 불과했던 기독교가 한민족과 일심동체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하게 착근에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강의 독려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모든 종교에서 가장 많은 16명이 기독교(개신교)인이었다. 하지만 민족대표들이 각 종교 대표들로 구성됐기에 자기 종교를 앞세우거나 힘 대결로 치달을 경우 민족적 대사를 이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큰사람만이 큰일을 이끌 수 있었다. 서명을 앞두고 자기 종교인을 먼저 써야 한다며 좌충우돌하는 민족대표들에게 남강은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의암(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이름을 먼저 써”라고 했다.
상당수 목사들이 따랐던 신사참배나 세속적 영리에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은 신앙을 지녔으면서도 그는 내 종교, 내 종파 에만 빠져 정의와 평화와 자유를 도외시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신앙을 경계했다. 그는 열네 살이나 적은 안창호의 말을 즉각 수용하고, 스물여섯이나 적은 유영모에게 기독교를 배울 정도로 품이 컸다. 이 교장은 “남강은 권위나 말을 앞세우는 그런 사람과는 전혀 달랐다”고 했다. 알고 깨달은 것을 즉각 실행하는 이가 바로 남강이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학생들을 위한 생리표본으로 만들어졌으나 일제는 그의 뼈마저 두려워 강압적으로 매장시켰다. 그러나 남강의 정신은 묻을 수 없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겨레신문 2007년 2월 28일)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울림 - 우리가 몰랐던 이땅의 예수들>(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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