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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순례기

4.성자가 된 깡패 최흥종

등록 2007-06-12 18:32

④ ‘나환우의 아버지’ 최흥종나환자 ‘지팡이’ 된 ‘주먹’ 집착 거세 무등산 수도  
소설가 문순태가 쓴 〈성자의 지팡이〉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단식 중인 최흥종(1880~1966) 목사를 무등산 속 오두막으로 대학교 2학년생 손자 협이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손자인 전남대 인류학과 최협 교수가 눈 쌓인 무등산이 펼쳐진 연구실에서 할아버지의 삶을 회고했다. 

최흥종은 젊은 시절 망치란 이름으로 장터와 뒷골목을 주름잡던 주먹이었다.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엄한 계모 아래서 살던 그는 열아홉 살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계모 보란 듯이 사람을 개 패듯 패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열한 살이나 어린데도 늘 형을 챙겨주던 배다른 동생 영욱이 “성님은 사람을 때리는 게 재미있어?”라고 안타까운 듯 물었다. 훗날 의사가 되어 최흥종이 설립한 광주기독교청년회(YMCA)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주고, 형의 자식 9남매까지 대신 보살펴준 동생이었다. 그 뒤 마음을 잡은 최흥종은 광주 양림동에서 선교의사의 조수로 일했다. 

“형은 사람 때리는 게 재밌어?” 동생 말에 선교의사 조수로 나환자촌 요구 ‘11일 행진’ 3·1운동 참여·광주기독교 초석 

어느 날 목포에서 활동 중인 선교의사 포사이트가 한 환자를 나귀에 태우고 왔다. 포사이트는 선교사들조차 ‘인간으로 오신 예수’라고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포사이트가 데려온 나환자는 온몸이 썩고 고름과 진물이 흘러 송장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당시만 해도 나환자 몸에 닿기만 해도 나병에 걸린다며 나환자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돌을 던지던 시대였다. 그런데 포사이트는 환자의 겨드랑이를 양손으로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환자가 한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놓쳐버렸다. 그러자 포사이트는 “지팡이를 집어주라”고 했다. 흥종은 고름과 핏물이 잔뜩 묻은 지팡이를 집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론 괴로웠다. 마침내 흥종이 용기를 내 지팡이를 집어 들어 나환자에게 건네주자 다 문드러진 나환자의 얼굴에서 작은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 순간 흥종의 가슴에 뭔가 뜨거운 것이 밀려왔다. 

흥종이 ‘작은 예수’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뜻하지 않게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병에 든 것만도 기막힌 일인데,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고 이웃들로부터 온통 돌팔매질만을 받아 가슴마저 찢겨지는 나환자들의 기막힌 설움이 바로 그의 설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뒤 흥종은 자신의 땅 1000평에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인 광주나병원을 설립해 나환자들을 보살폈다. 그로 인해 광주에 나환자들이 많아지자 광주시민들은 “광주를 문둥이 촌으로 만들려느냐”며 반발했다. 그러자 여수 애양원의 전신인 나환자촌으로 나환자들과 함께 이동해 함께 살았다. 그는 한국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해 나환자들을 돌보았으나 여전히 갈 곳 없는 나환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그가 단행한 것이 일제 때 큰 화제를 불러온 나환자행진이다. 그는 나환자 수백 명과 함께 무려 열하루에 걸쳐 광주에서 서울까지 행진해 총독에게 전남 고흥 소록도 나환자촌을 확대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오늘날 소록도 나환자 갱생원이 설립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최흥종의 삶에 감명 받아 평생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에게 헌신하다 삶을 마친 의학박사 신정식의 책상엔 늘 사진 석장이 놓여 있었다. 최흥종과 포사이트, 예수의 사진이었다. 

3·1운동의 주동자 가운데 한명으로 1년4개월의 옥고를 치렀던 최흥종은 전라도의 시민운동, 청년운동의 대부이기도 했고 북문안교회, 북문밖교회 등 광주지역 초기 교회들을 이끌어 광주를 기독교의 메카로 만든 주인공이기도 했다. 좌·우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들이 갈라져 싸움을 벌일 때도 뒷골목 두목 출신의 카리스마와 넓은 포용력을 지닌 그 앞에선 모두 하나가 되었다. 

나환자들의 삶이 어느 정도 정착되자 그는 1935년 서울 세브란스병원의 친구에게 부탁해 거세를 해버린 뒤 스스로 명예욕과 물질욕, 성욕, 식욕, 종교적 독선까지 ‘다섯까지 집착으로부터 해방’을 뜻하는 오방(五放)정을 무등산 속에 지어 홀로 살았다. 해방 뒤 김구는 오방정에 일주일을 머물며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자고 호소했으나 끝내 거부하자 ‘화광동진’(和光同塵·성자의 본색을 감추고 중생과 함께함)이라며 그를 칭송하는 휘호를 남기고 떠났다. 

성경과 도덕경을 읽으며 생의 마지막 100일을 단식으로 마무리한 뒤 그가 육신을 벗자 광주시민들은 광주 최초의 시민장으로 그를 보냈다. 그의 관 뒤엔 수백 명의 나환자와 걸인이 뒤따르며 “아버지 저희들은 이제 어찌합니까”라고 뒹굴며 울부짖었다. 문순태는 오방을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성자’라고 불렀다. 광주/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겨레신문 2007년 2월 14일자)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울림 - 우리가 몰랐던 이땅의 예수들>(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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