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무원 원경선 원장 꾸민구석 없어보이는 ‘촌로’ 90살에도 풀처럼 푸르다
“농약은 살인” /소비자도 살리고 /땅도 살리고 /자신의 고질병도 완치한 /유기농으로 유명하지만… /사유재산없이 누구든 /함께 일하며 /먹고 살수 있도록 /공동체의 꿈 20여년 /부천 양주를 거쳐 /내년엔 다시 괴산으로 /함께…나눈…삶이 /이어진다
경기도 의정부 북부전철역에서 30번 버스를 30여 분 달린 뒤 내려 오솔길로 접어든다. 양주군 회천읍 옥정리 풀무원이다. 정신박약자인 40대 남자에게 원경선 선생집을 물으니 천사처럼 해맑은 얼굴을 지으며 잘 안내해준다. 그 역시 풀무원 식구다.
인공적으로 멋스럽게 꾸민 구석이라곤 없어 보이는 촌스런 집의 촌로. 원경선(89)·지명희(85) 부부 만큼 촌스럽고 자연스러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국 나이로 ‘아흔’살에도 풀처럼, 나무처럼 푸르다. 어떤 삶이었기에 지금껏 이렇게 푸를까? 원씨는 애초 1914년 평남 중화군의 빈농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굶기를 밥먹듯하고 자랐다. 지금의 초등학교인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만도 천행일 정도였다. 더구나 어려서 간디스토마까지 앓아 평생 누구에게 한 대 맞은 것처럼 두통이 심하고, 현기증까지 일 정도로 고생했다. 고향에서 농사짓다 18살에 상경해서도 그는 목장 일과 우유배달에 지쳐 다니던 야학마저 중단해야 할 정도로 고달픈 삶을 전전하다 부인과 함께 중국 베이징에서 타국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그를 지탱한 것은 11살 때 접한 기독교 신앙과 현미식 덕택이었다. 해방 뒤 중국에서 귀국한 그는 토건업 등을 하다가 55년 부천에 2만5천평의 땅을 마련해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미군 군목들이 데려온 아이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꿈에 그리던 봉사의 삶이었다. 한나절은 성경을 배우고, 한나절은 함께 일을 하도록 했다. 이름을 풀무원이라고 붙였다. 버려진 온갖 잡철을 녹이고 담금질해 새롭게 변화시키는 ‘풀무’를 꿈꾼 것이다.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던 그의 신앙과 사상이 자리를 잡은 것도 이때였다.
70년대 중반 미국을 다녀오던 중 일본의 농촌에 들러 당시 일본에서도 생소했던 유기농 현장을 보고 그는 ‘곧 먹을 음식에 농약을 치는 것은 살인 행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귀국 뒤 76년 이곳 양주로 거처를 옮겨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정농회를 결성해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유기농업을 했다. 그가 고질인 두통을 완치하고 지금껏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로 여기는 현미식사를 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소비자도 살리고, 자신도 살고, 땅도 함께 사는 ‘바른 농사’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특히 이곳은 성경적 무소유의 삶의 실험장이 됐다. 공익재단 한삶회를 만들어 사유 재산 없이 누구든 이곳에서 함께 일하며 먹고 살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일하지 않고 놀고 먹을 꿈을 꾸거나 일한 만큼 제 몫을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골수에 박힌 사람들에겐 이 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간 돌아가곤 했다. 그래도 늘 40~50명이 함께 살며 공동체를 일구었다.
공동체에선 도둑질하다 걸려 이곳으로 도망온 사람까지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쌓아두거나 열쇠를 채워두지 않고 개방했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원씨는 이처럼 개인이나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서 인류 공동체 정신으로 산다면 전쟁이 없는 세상이 올 것으로 믿고 있다. 풀무원은 구제금융 위기 때 경제적으로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이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여기고 있다. 내년엔 이곳을 정리하고 충북 괴산군 청천면으로 옮긴다.
그 곳에서 20~30명이 함께 공동체로 살며 유기농사를 지으며 나눔을 실천하고, 그의 삶에서 체험한 평화 훈련을 할 예정이다. 〈끝〉 조현 기자 (한겨레신문 2003년 8월 22일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