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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순례기

동광원 무등산 분원

등록 2005-10-28 22:26

소화 데레사 자매원 김준호 선생 스승이 물려준 ‘사랑의 불씨’ 수도와 봉사로 이어가지요

빛고을 광주의 무등산 자락을 돌아 4수원지를 지난 화암마을 골짜기의 ‘소화 자매원 분원’. 돌계단 위 초라한 오두막에 흰 옷 입은 노인이 학처럼 앉아 있다. 은수자(은둔 수도자) 김준호(79) 선생이다.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최고의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 시험을 준비하던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든 것은 이현필(1913~64) 선생이었다. 

23살 청년의 삶 흔들어 놓은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그 뜻 따르려 의사의 길 포기 거지왕초로 10년을 살고 시한부 폐병환자들 거두며 3년전엔 데레사의 뜻 이은 독신여성 수도원 설립도 

교회 종소리에 끌려 간 해남읍 수동교회에 어느날 왜소하고 꾀죄죄해 보이는 30대 농부 같은 이가 초대되었다. 신자들과 바닥에 둘러앉은 그는 화병에 꽂아놓은 국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꽃을 꺾지 마세요.” 

자연을 자신의 몸처럼 여기는 이현필 선생의 한마디가 23살 청년 준호의 영혼을 흔들었다. 일자무식자가 40살에 독학으로 성경을 접한 뒤 100여 마지기의 논밭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평생 누더기를 입고 밀가루 범벅으로 끼니를 때우고 자비의 삶을 살다간 이세종(1880~1942) 선생, 이 선생의 제자로 음식을 빌어 오갈 데 없는 고아, 걸인, 폐병환자들을 먹여 살리며 자신은 맨발로 눈길을 걸으며 끼니조차 잇지 못하고 살다 폐병으로 죽어 ‘맨발의 성자’ 또는 ‘동방의 성 프란체스코’로 불리는 이현필 선생. 그가 독특한 한국적 영성의 꽃을 피운 이들의 뒤를 잇게 되는 순간이었다. 의사의 길을 포기한 그는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던 이현필 선생을 6개월 뒤 겨울에 광주에서 만났다. 이 선생은 얼마나 굶었는지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찬 골방에서 새파랗게 얼어 화롯불을 쬐고 있었다. 애타게 그리던 스승의 참담한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스승도 아무말이 없었다. 그렇게 2시간여가 흐른 뒤 불씨를 다독이던 스승이 한마디를 던졌다. 

“이것만 알면 다 알 텐데.” 

천지 창조 이전을 묻는 화두였다. 그는 훗날 그 불씨와 같은 내 안의 성령을 알면 더이상 알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별말이 없던 스승은 어느날 그를 보며 다리 밑을 가리켰다. 스승을 따르는 사람들이 꾸리던 동광원의 고아 600여 명 가운데 자유분방한 50여 명이 다리 밑에서 살고 있었다. 그 뒤 그는 다리 밑과 해남 간척지 등에서 그들과 10년을 ‘거지 왕초’로 살았다. 그는 스승의 손가락만 보고도 그런 삶에 뛰어들었다. 그가 스승과 거의 함께 살지 않았지만 이현필 선생을 따르며 지금까지 남원 동광원, 광주 귀일원, 무등산, 화순, 경기도 벽제, 전북 장수 등에서 수도와 봉사의 삶을 살아가는 40여 명의 독신 수도자들이 그를 이현필 선생처럼 따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33살에 스승처럼 폐병에 걸렸던 그는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병원에서조차 쫓겨난 시한부 동료 환자들을 위해 무등산 골짜기 이곳 저곳에 움막을 쳤다. 1956년 폐병으로 죽어가던 한 젊은이가 읊은 성 소화 데레사의 시는 그의 영혼을 다시 한 번 흔들었다. 

“사랑으로 죽는 것/제 희망 오직 이것뿐/타고 싶어라 내 마음/그 분 사랑의 불에.” 

그는 3년 전 윤공희 대주교의 특별 배려로 조비오 신부와 함께 독신 여성 수도원인 ‘소화 데레사 자매원’을 설립했다. 가톨릭 밖의 이현필 선생의 영성과 가톨릭의 소화 데레사의 영성이 일치했다. 이 수도원을 통해 많은 수도자들이 스승과 프란체스코와 소화 데레사가 간직한 사랑의 불씨를 이어가기를 소망하는 그의 사랑의 눈길이 단풍처럼 무등산을 곱게 곱게 물들이고 있다. (062)266-4329. 광주/글·사진 조현 기자 (한겨레신문 2002년 10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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