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예수> 펴낸 오강남 교수
“내 속에 하느님 있다는 진리 받아들이면
불교나 도교나 힌두교 등과 차이 없어져”
<예수는 없다>는 책으로 파란을 일으켰던 신학자 오강남(67)교수가 이번에 <또 다른 예수>(예담 펴냄)를 들고 나타났다.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성서로 알려진 도마복음을 풀이한 이 책의 출간에 때맞춰 방한한 오 교수를 만났다. 캐나다 리자이나대 비교종교학과를 2년 전 정년퇴직한 그는 명예교수로 가끔씩 출강하며 캐나다 밴쿠버에서 설산을 오르내리며 진리를 추구하는 도반들과 함께 ‘길벗들의 모임’을 꾸려가고 있다.
<도마복음>은 1945년 이집트의 나일강 상류 나그함마디 산 기슭에서 발견된 열세 뭉치의 고문서 속에 포함돼 세상에 알려졌다. 22살에 옥스퍼드대 교수가 되어 신비주의에 대한 방대한 저술을 낸 앤드류 하비가 ‘같은 해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문헌’이라고 꼽을 만큼 폭발력을 지닌 것으로 전해졌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수의 쌍둥이라는 도마가 저술한 이 책은 예수가 전하는 ‘비밀의 메시지’가 담긴 것으로 알려진 때문이었다. 도마복음은 지금까지 인류를 폭력과 살생으로 점철케한 종교간 골을 단번에 메울 수 있는 메시지여서 신학의 지평을 넓히려는 소수에겐 구원의 빛이 되고 있는 반면 기독교 보수 쪽에서 ‘예수의 유일성’을 위협할 수 있는 뇌관으로 경계하며 금기시하고 있다.
“어느 종교에서나 심층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소수에 속할 수밖에 없지요. 불교도 불성을 찾아야한다는 쪽이 주류가 되는 게 아니라 기복불교가 주류가 되고 있지않습니까. 어디든 현세적으로 복을 준다는 쪽이 인기를 끌게 마련이지요.”
오 교수는 도마복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기복을 추구하는)다수가 진리를 추구하는 <도마복음>을 이단시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더구나 “(목사와 신부 등 종교지도자를 거치지않고) 스스로 하나님과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니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용납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도마복음>에 깊게 매료됐음을 감추지않는다.
“이 책에선 ‘하나님은 내 마음 속에 있다’고 합니다. ‘나를 찾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란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이란 것이지요. 내 속에 하나님이 있다면 다른 사람 속에도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를 사랑하지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불교나 도교나 힌두교나 어떤 종교와 차이가 없습니다. 아무리 문맹이 97%였던 초기 기독교시대라 해도, 이런 위대한 진리이자 신비주의인 ‘내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생각’이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 교수는 “그렇지만 21세기 가장 위한 가톨릭 신학자인 칼라너가 ‘21세기에 기독교가 신비주의적이 안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했듯이 이제 문맹율이 현저히 줄고 대중들이 깨어난 소수만이 진리를 점유한데서 그치지않고 신비주의의 민주화와 대중화와 생활화와 일상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눈을 뜬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이 깨지는 경험”이라고 했다. 문명화한 시대에서 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눈뜸’이라는 것이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cho@hani.co.kr
나그함마디 문서란
1945년 12월 어느날, 무함마드 알리라는 이집트 농부가 다른 몇 사람과 함께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나일강 상류 나그함마디라는 곳 부근 산기슭에서 밭에다 뿌릴 퇴비를 채취하려고 땅을 파다가 땅 속에 토기 항아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혹시 귀신이라도 들어 있으면 어떻게 하나 무서웠으나 금덩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아리를 열어보았다. 귀신이 나오지않아 안심은 되었지만, 실망스럽게 금덩어리도 없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가죽으로 묶인 열세 뭉치의 파피루스 종이 문서 뿐이었다. 문서가 들어 잇는 그 항아리가 금으로 가득한 항아리보다 더 귀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던 그는 단지 고문서도 골동품으로 값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시장에 가지고 나가 오렌지, 담배, 설탕 등과 맞바꾸었다. 그 후 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고문서 전문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4세시초 로마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을 통치할 하나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를 공인하고,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종교, 하나의 신조, 하나의 성서’로 통일할 것을 요청했다. 그에 따라 325년 니케아공의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젊은 추기경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파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당시 개별적으로 떠돌아다니던 그리스도교 문헌들 중 27권을 선별해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정경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해 367년 자기의 신학적 판단 기준에 따라 ‘이단적’이라고 여겨지는 책들을 모두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그함마디 문서는 이 때 이집트에 있던 그리스도교 최초의 수도원 파코미우스의 수도승들이 그 수도원 도서관에서 몰래 빼내 항아리에 넣어 밀봉한 다음 나중에 찾기 쉽도록 산기슭 큰 바위 밑에 있는 땅 속에 숨겨놓은 책들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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