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장
두 쪽 비난 무릅쓰고 유영모-함석헌 함께 조명
“언론은 사회 심장이고 허파, 공공성 강화해야”
씨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를 메웠던 한해가 저물고, 다시 씨알들의 한해가 오고 있다. 올 한해는 씨알이 종교·철학 사상으로서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씨알사상연구소를 통해 씨알사상이 대중들에게 강의되고, 지난 여름 동양에선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린 철학올림픽인 세계철학대회에서 유영모·함석헌의 씨알사상이 소개돼 큰 반향을 불러왔다. 철학대회 다른 분과엔 수강생이 서너명에 불과했지만 유영모·함석헌 분과엔 무려 800명이 수강을 신청할 만큼 관심이 폭발했다. 이런 영향으로 유럽의 세계적인 철학잡지인 <콩코디아>에서 내년 봄호에 유영모·함석헌 사상을 특집으로 다루기로 했고, 일본 정신문명의 산실인 교토포럼이 씨알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새로 주목받는 씨알사상을 세상에 알리고 있는 선봉장인 씨알사상연구소장 박재순(58) 목사를 지난 29일 연구소가 있는 서울시청 인근 대양빌딩에서 만났다.
대학 1학년 때 함석헌 만나…민청학련으로 옥살이
청초한 난처럼 맑은 얼굴의 박소장은 앉아서 맞는다. 그 옆엔 목발이 놓여 있다. 네살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았던 그의 삶이야말로 씨알의 생명력이 없었다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시들어버렸을지 모른다. 그의 어디에서 동토 밑에 얼어있던 씨알사상을 지상으로 밀어내는 힘이 나오는 것일까. 고난을 통해 단련된 정신에서만 나올 수 있는 힘이 가녀린 그의 몸 밖으로 분출된다. 하지만 함석헌(1901~89))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여리디 여린 한 떨기 꽃잎과 같았다.
그가 처음 함석헌을 만난 것은 서울대 철학과 1학년 때였다. 서울대에 강연을 온 함석헌은 70대 노인인데도 몸이 꼿꼿하고, 눈에 불이 나오는 것 같고, 기세가 하늘을 뚫는 것 같았다. 무섭고 두려워 가까이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대학 4학년 때 서울 용산 원효로에 있는 함석헌의 집에 가서 가까이 보니 그렇게 부드러울 수 없었다. 강연 때 눈에 불을 뿜어내던 것과는 달리 인자하기 그지 없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나와 한신대에 편입해 다니면서도 늘 함석헌의 강연을 쫓아다녔다. 친구 후배 20여명과 함께 함석헌의 집에서 바가바드 기타를 배웠고, 서울 신촌에서 함석헌이 주도했던 퀘이커모임에도 나갔다. 이 나라 최고 지성인들의 ‘선생’이었음에도 함석헌은 나약하고 어린 학생에게도 따뜻한 배려를 잃지 않았다. 함석헌은 대학 때부터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던 그를 위해 자신의 회중시계를 주었다. 또 76년 휘어지던 척추를 펴는 대수술을 할 때는 아침 일찍 부산에서 올라와 수술 5분 전에 그에게 달려와 수술실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자신의 집에서 마루에 앉아 시든 나무를 보고선 “저 나무가 재순이 같다”며 눈물을 훔치더란 애기를 들었다.
막판에 여자문제로 안 좋았지만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
씨알사상의 뿌리인 남강 이승훈(1864~1930)과 유영모(1890~1981))에 대해 들은 것도 함석헌을 통해서였다. 일찍 조실부모하고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던 남강은 ‘백성이 새롭게 깨어나지 않고서는 나라도 되찾을 수 없다’는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평안도 용동에 오산학교를 세워 조만식, 신채호, 이광수, 유영모 등을 교사로 세워 함석헌, 한경직, 주기철 등 수많은 민족지도자들을 길러내고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었다. 대학 때 천안으로 간 수련회에서 함석헌은 달밤에 마루에 앉아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남강 얘기를 꺼낼 때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내게 참 좋은 스승이 계셨지!”라며 스승 유영모 얘기를 들려주었다.
박 소장이 유영모를 처음 직접 만난 것도 함석헌을 따라서였다. 북한산 계곡을 건너자 복숭아꽃이 만발한 집에서 흰머리 흰수염을 단구의 노인이 나오는데 얼굴이 복숭아빛이고 분 바른 것처럼 희었다. 평소 하던 대로 무릎을 꿇은 채 앉은 유영모는 “이 문명은 망해가는 문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의 욕심 때문에 인류가 망하더라도 생명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프리카의 밀림 숲에서 다시 생명이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막바지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함석헌의 여자문제를 들어 유영모가 함석헌을 호되게 꾸짖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소장은 유영모와 함석헌은 떼려야 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유미특허법인 김원호 대표가 3억원을 출연해 출범된 씨알재단을 통해 그는 유영모와 함석헌의 사상을 함께 조명하고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제와 독재의 현실을 외면한 유영모에게 묶어 함석헌을 팔아먹었다는 함석헌 제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유영모의 제자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한 함석헌을 유영모가 함께 엮는다며 비난했다.
그도 그럴듯이 표면적으로 유영모와 함석헌은 너무나 달랐다. 유영모는 지나치리만큼 금욕적인 삶을 사는 영성가였고, 함석헌은 열정적이고 자유분방했다.
너무나 달랐지만 너무나 사랑한 두 사람
그러나 둘은 너무나 서로 사랑했다. 유영모의 장례를 주관했던 함석헌은 1주기 때도 “내가 선생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면서 “내가 못났지만 이만큼이나마 된 것은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영모의 제자 사랑도 남달랐다. 해방 뒤 여운형 등이 찾아와도 크게 반가운 내색을 하지 않던 유영모는 함석헌이 남하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며칠 전부터 집안 대청소를 했는데, 그 때 굴뚝까지 청소하던 딸이 낙상해 다리가 부러져 6개월 동안 깁스를 하기도 했다. 유영모는 60년대 초 <리더스 다이제스트> 잡지와 인터뷰 때 “내 동쪽벽은 남강이요, 서쪽벽은 함석헌”이라며 자신은 두 벽 사이에 살고 있다고 했다. 80년대 초엔 다석의 제자인 박영호 선생이 광주 동광원에 모시고 갔을 때 어느날 아침 유영모가 풀석 주저앉아서 뇌졸중인 줄 알고 쫓아갔더니, 유영모는 “그이도 지금쯤 일어났을 텐데. 그이는 지금 무얼 생각하고 있나”라며 혼잣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이는 말할 것도 없이 함석헌이었다.
유영모가 현실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남강도 유영모를 자식처럼 믿어서 3·1운동 당시 천도교로부터 받은 자금 5천원을 유영모에게 맏겼다고 한다. 함석헌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가장 저명인사가 된 60살까지도 스승의 강의를 들으러 다녔고, 60년대 초까지 유영모도 함석헌의 대중강연에 늘 함께 다녔다. 씨알이라는 말도 유영모가 <대학>에 나오는 친민(親民)을 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유교에선 군자는 본능을 억누르고 본성을 실현하는 데 반해 민(民)은 어리석고 못나게 보던 기존의 관점을 뒤짚어 친민을 씨알로 풀이해 지도자들이 백성을 어리석은 이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한다는 씨알정신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 씨알정신이 3·1운동과 임시정부, 그리고 헌법정신의 기초가 되었는데, 현재 근대사를 왜곡하는 것은 지금까지 일제의 군국주의 발 아래서 형성된 한국의 철학, 사상과 대학의 학맥을 바로잡지 못한 탓이라고 했다. 현재 매스컴의 공공성을 무시한 이명박 정부의 언론정책 추진도 왜곡된 정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언론은 사회의 심장이고 허파다. 사회적 공공성은 더욱 더 강화돼야 한다. 더러운 공기와 피를 내보내면 몸 전체가 죽는다. 그래서 그 어두운 시대에도 함석헌은 광야에서 홀로 외쳤다. 그래서 송건호 선생은 당시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인의 총합보다도 함석헌 개인의 목소리가 더 힘차다고 할 정도였다.”
다시 씨알 정신의 회복을 희구하는 박 소장은 말했다. “어려움에 처할수록 씨알은 더 옹골차진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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