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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조현이만난사람

초라하게 살려 보길도로 떠난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의 인생2막

등록 2023-05-10 07:18수정 2023-05-10 14:10

전남 완도 보길도 선창리 자택의 김민환 교수 뒤로 섬과 바다가 펼쳐져 있다. 조현 기자
전남 완도 보길도 선창리 자택의 김민환 교수 뒤로 섬과 바다가 펼쳐져 있다. 조현 기자

‘나’보다 ‘우리’가 익숙했었던 우리. 그러나 어느새 ‘우리’보다 ‘나’를 앞세운 시대입니다. 경쟁과 적자생존 속에서 빈부격차, 정치 이념 갈등과 남녀노소로 갈리며 개인과 개인의 소통도 막혀갑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이 더욱 그립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함께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함께하니 더 기쁜 삶-일상 고수에게 듣다’를 10차례에 걸쳐 진행해 더불어 사는 삶이 주는 맛을 나눕니다. 여섯번째는 전남 완도 보길도에 사는 전 한국언론학회장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입니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처럼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 나오는 노 젓는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남 완도 보길도 가는 길은 전설 속의 섬 파랑도만큼이나 아련하다. 전남 해남 땅끝이나 완도읍에서도 배를 타고 40~50분을 가고, 노화도 선착장에서 다시 차로 30~40분을 더 가야 나오는 땅끝 중의 끝에 김민환(80) 고려대 명예교수가 살고 있다.

귀양을 보낼 봉건시대도 아니고, 왜 이렇게 외진 섬으로 내려와 사는 것일까. 이런 의문도 잠시, 보길도 선창리 김 교수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의문은 선망으로 바뀐다. 눈이 시린 푸른 바다를 뒤로 하고 공깃돌처럼 앙증맞은 작은 무인도 셋이 손에 닿을 듯 떠있다. 언제나 보름달처럼 선창리를 비춰주는 월매봉까지, 이런 선경이 또 있을까. 지리산에서 열린 전국 신선회합에 가기 위해 날아가던 한라산 신선들이 이곳을 내려다보고 경치에 반해 좀 쉬어 가려다 영영 주저앉았다는 선창리에서 김 교수는 신선 같은 흰머리로 맞는다.

김 교수는 1981년부터 11년간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하던 시절 학생들을 데리고, 고향인 장흥보다 보길도를 자주 찾았다. 그때부터 정년퇴직하면 보길도를 오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1992년 모교인 고려대로 옮겨 20년가량 미디어학부 교수를 하며 고려대 언론대학원장과 교수협의회 의장, 한국언론학회장, 다산연구소 대표, 네이버 자문위원장 등을 지낸 그가 정말 은퇴하고 보길도에 올 줄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은퇴할 즈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지금까지 내실에 비해 너무 과대포장됐다고 생각했다. 한 자리라도 더 얻으려고 할 게 아니라 이제는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그는 정년퇴임하고 2010년 보길도행을 결행했다. 한국방송 피디 출신인 부인은 보길도행을 거부하다 3년 뒤 합류했다. 얼마 전 결혼 50돌이었는데, ‘50년 동안 살면서 유일하게 잘한 짓거리가 보길도에 내려온 것’이라는 부인의 말을 전하며 김 교수는 통쾌하게 웃었다. 그는 10대 문학소년 때부터 꾼 꿈을 보길도에서 펼쳤다. 섬에 온 지 3년 만에 일본 호오류사 금당벽화를 그린 고구려 승려화가를 소재로 한 소설 <담징>을 내놨다. 출간 뒤 곧 5쇄를 찍어 소설가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셈이었다. 이어 5년 뒤엔 그가 고려대 재학 때 체험한 어두웠던 시대상을 담은 자전적 소설 <눈 속에 핀 꽃>을 냈다.

최근작은 2021년 출간한 <큰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 한 고을에서도 이념으로 갈려 서로 죽고 죽이기를 예사로 했던 해방공간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지켜낸 전남 보성의 봉강 정해룡이란 인물을 조명한 이 소설은 문학계 안팎에서도 호평을 받아 지난해 이병주문학상과 노근리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보길도에 내려온 이후 13년간 주로 창작에 몰두해 문학소년의 꿈도 이뤘지만,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살리라’란 꿈과는 멀어졌다. 인심 좋은 섬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외로울 틈이 없어졌다.

그의 소박한 집은 지은 지 13년이 되자 나무 계단들은 썩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일어나 밖에 나와보면 그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썩은 계단에 나무판을 덧대서 말끔히 고쳐놓았다. 잔디 깎는 예초기 사용에 서툰 그가 예초기가 고장이 나 작동이 안된다고 하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군가 와서 예초기를 고쳐놓았다. 어느 날은 물이 나오지 않았다. 마을 분에게 전화하니,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하더니 한참 뒤 올라와 수도를 고쳐주었다. 바다에서 전복을 따다가 김 교수의 말을 듣자마자 일을 멈추고 배를 몰아 달려온 것이었다.

“반대쪽 예송리만 해도 관광객이 많아서 숙박하는 집들이 적지 않지만, 우리 동네 분들은 너무 순박해서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잠을 재워준다는 생각조차 못해요.”

그의 집은 해안도로에서도 산 쪽 언덕을 한참 올라와야 한다. 이장이 동네 스피커로 공지하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이장은 꼭 따로 전화하거나 직접 와서 전해준다. 선창리 주민뿐이 아니다. 소설을 쓰다가 글이 막혀 머리도 식힐 겸 노화도 대처의 카페나 중국집에 자장면을 먹으러 가면, 어느새 누군가 돈을 내버리곤 했다. 그의 집터가 넓어진 것도 마을 주민들과 허물없이 지냈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제삿날이나 생일날 초대를 받아 갈 때 ‘교수 집 옆에 있는 우리 밭 좀 사달라’고 애원해서 사줬더니 또 다른 주민이 ‘왜 그 집 밭은 사주고 우리 밭은 안 사주냐’고 하는 통에, 무려 1500평으로 넓어졌다.

서울에서 섬을 찾은 지인들에게 보길도 자랑을 하니, 그는 아무도 임명하지 않은 보길도 홍보대사가 됐다. 특히 그가 언론학자로서 연륜을 십분 발휘한 게 고산 윤선도에 대한 ‘가짜뉴스’ 바로잡기다. 그도 보길도 주민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고산이 은둔을 핑계로 이곳에 와서 주색잡기나 한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고산 연구자들을 만나 들어보니, 고산은 막걸리 2잔 이상을 못 마시던 사람이었고, ‘노비들을 시켜 도르래로 산 정상까지 술을 올려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풍문과도 전혀 다른 삶을 산 인물이었다.

“고산은 다른 양반들이 자기 종들을 보내 자기 집 일을 돕게 하면 그냥 부려먹지 않고 일일이 품삯을 쳐준 분이었다. 진도와 노화도 바다를 막아 간척을 해서 옥토를 만들어 그 땅을 독차지하려는 부자들은 제쳐두고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주 싸게 불하해줘 굶주림을 면하게 했다. 우리가 지금처럼 미역을 일상적으로 먹고살게 된 것도 고산 덕이 크다. 고산은 섬사람들이 농사만 지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미역을 뜯어 대처의 시장에 내다 팔도록 판로를 개척해줬다.”

전남 완도 보길도 선창리 집을 찾은 손님들에게 완도산 전복죽을 대접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김민환 교수. 조현 기자
전남 완도 보길도 선창리 집을 찾은 손님들에게 완도산 전복죽을 대접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김민환 교수. 조현 기자

버스로 관광객을 실어온 가이드들은 하나같이 ‘윤선도가 도르래로 술을 올려…’라며 고산을 안주 삼았다. 그는 득달 같이 가이드에게 달려가 “앞으로 한번만 관광객들 앞에서 그런 가짜뉴스를 퍼트리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해 다시는 고산을 주색잡기의 달인으로 묘사하지 못하도록 앞장서기도 했다. 고산이 그렇게 주색잡기만 하고 섬사람들의 인심을 얻지 못했다면 왕이 당시로선 반체제인사인 그를 보길도에서 20년이나 살도록 곱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 교수는 얼마 전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호소문을 올렸다.

“국립해양수산박물관은 완도에 세워야 합니다. 면장님이 찾아오셨는데, 박물관 유치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으면 쫓아내겠답니다. 저는 보길도에 이대로 살고 싶습니다. 페친 여러분, 박물관 완도 유치를 도와주세요.”

그는 이제 영락없는 보길도 주민이다. 죽어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을 작정이다. 가톨릭 신자인 그가 다니는 성당 신부에게 “제겐 선창리보다 더한 천국은 없으니 죽어도 선창리에서 살게 해달라고 하느님한테 사정 좀 해달라”고 할 정도다. 소년 시절 서당에 다니며 <논어>에서 본 공자의 ‘이인’(里仁)에 꽂혀, ‘어진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정착한 그는 <큰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에서 ‘어진 인물’의 전형인 봉강 정해룡이 이념에 의해 서로 죽고 죽이는 해방공간에서도 마을공동체를 어떻게 지켜가는지를 그려냈다.

봉강은 김 교수의 고교 때 친구의 큰아버지이기도 하다. 김 교수에 의해 새롭게 조명된 봉강은 명문가 양반이면서도 귀천을 따지지 않고 먼저 공손하게 절했고, 해방 이후 자기집 종 열일곱 가족에게 땅을 공짜나 다름없이 넘겨줘 ‘한국의 톨스토이’라고 칭송받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을 꾀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를 돕다가 한국전쟁 중에 한때 인민위원장을 맡아 곤욕을 치른 봉강은 여순사건 등의 이념 갈등 소용돌이 속에서 6촌 이내 친족 8명이 학살되거나 처형당했고 30여명이 옥고를 치르고, 3천석 대지주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봉강은 이념적으로 한쪽에 경도되지 않은 인물이지만 한국전쟁으로 좌우가 뺏고 뺏길 때마다 보복 살육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무덤인 줄 알면서도 인민위원장을 맡았어요. 전후 봉강이 경찰에 끌려가자 국회부의장을 지낸 황성수의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가 ‘전쟁통에 산에 짐승이 사라지고, 마을엔 사람이 사라졌다. 오직 봉강 혼자 우뚝 서서 사람들을 살렸다’며 ‘만약 봉강을 죽이면 자식뻘인 봉강을 대신하는 일을 고향에서 내가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봉강을 살려냈지요. 박정희 정부 때 봉강을 사찰한 경찰이 퇴직을 앞두고 앞장서서 봉강 추모비를 세웠어요. ‘인품이 너무 훌륭한 분을 괴롭혔다. 죽어서라도 용서받고 싶다’면서요.”

그는 언론학자답게 “같은 목소리만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의 언로들이 나와야 한다”면서도 “자기주장만으로 남을 억누르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치국(나라를 다스림)을 말하기 전에, 우리가 사는 곳들을 ‘어진마을’로 만들어가는 분이 어른”이라며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무슨 풍파가 와도 이웃 사람들과 마을을 해치지 않게 하고, 오손도손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을을 지켜나가는 어진 마음이 우선이에요.”

완도/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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