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작가가 20일 기자간담회에서 새 소설 <아소까대왕>을 소개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그리스에 알렉산더대왕이, 몽골에 징기스칸이 있다면 인도엔 아소카대왕이 있다. 아소카대왕은 정복군주이면서도 알렉산더나 징기스칸과는 다른 덕목이 있었다. 가장 잔혹한 살육자에서 평화주의자로 극전인 전환을 이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몽이나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만큼, 인도에선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주인공이지만 한국엔 생소한 <아소까대왕>(불광출판사)을 3권의 소설로 펴낸 정찬주(70)를 20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만났다.
기원전 3세기 인도 첫 통일왕조
이복형제 99명 죽이고 3대 왕위
칼링가 전투 대규모 사상자 ‘충격’
‘살육자에서 평화주의자로 전환’
‘아소까대왕’ 3권짜리 출간 간담회
“1995년부터 15번 인도 흔적 답사”
아소카대왕은 인도를 침략한 알렉산더의 군대를 몰아내고 인도 최초의 통일왕국을 연 마우리아왕조 창건자 찬드라굽타의 손자다. 그의 생몰 연대는 기원전 265~238, 혹은 기원전 273~232년설이 있다.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왕은 중앙인도와 데칸고원까지 넓힌 영토를 분할통치하기 위해 무려 16명의 부인을 맞아들여 101명의 왕자를 두었다. 아소카대왕은 친동생 한명만 빼고 이복형제 99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렇게 즉위한 8년 뒤 치른 칼링가 전투는 피의 전쟁이었다. 칼링가국은 코끼리부대까지 갖춰 찬드라굽타마저도 정복하지 못한 강소국이었는데 마우리아국이 벵골만으로 진출해 동남아와 스리랑카까지 교역로를 넓히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칼링가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수십만명의 사상자를 본 아소카대왕은 다야강에 칼을 버리고, ‘이제 (전쟁의) 북소리의 정복자가 아닌 담마(진리)의 정복자가 되자’고 다짐했다.”
정 작가는 피의 군주 아소카대왕이 ‘산생명을 해하지 말라’를 첫 계율로 내건 불교를 받아들이기까지 심리적 전환을 문학적 관점에서 이렇게 풀어냈다.
“왕궁 베란다에서 어느날 길거리를 내려다 보던 아소카대왕은 어린 사문(승려)이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데려오라고 한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는 왕위 계승 1순위였다가 독살당한 이복형 수시마의 아들 니그로다였다. 그로부터 짧은 ‘법구경’을 듣고 아소카대왕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하나, 이복형에 대한 미안함으로 니그로다를 환대했을 것이다. 또한 불심이 깊었던 어머니 다르마 왕비와 3번째 부인 데비의 영향으로 붓다의 자비심을 배웠을 것이다.”
그는 “아소카대왕이 없었다면 불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못한 채 인도에서 소멸했을지 모른다”고 했다. 아소카대왕이 담마사절단 혹은 전법사를 스리랑카는 물론 지중해 연안인 이집트, 그리스, 시리아까지도 파견했기에 한·중·일 삼국은 물론 동남아 전체에 불교가 전통 종교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정찬주 작가가 20일 기자간담회에서 아소카대왕의 집필을 위해 인도 현지를 답사한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정 작가는 아소카대왕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인도를 무려 15번이나 다녀왔다. 1995년 2월 한달 일정으로 후배 시인과 함께 인도를 방문한 게 처음이었다. 그는 인도에 도착한 첫날 큰 마음 먹고 고급호텔에 숙소를 잡았는데 그날 밤 침대 밑에서 쥐가 나왔단다.
“호텔 지배인을 불러서 ‘어떻게 이런 고급호텔 침대에서 쥐가 나올 수 있느냐’고 따지니, 그가 말했다. ‘세상엔 인간만 사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보탰다. ‘쥐도 우리 인간의 친구입니다’.”
선과 악,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고정관념을 싹둑 베는 듯한 지배인의 말은 그가 막 순례를 시작하려던 아소카대왕의 반전 인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때 방문한 곳마다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아소카 석주가 서있는 것을 보고, 2300여년 전 아소카대왕이 8만4천개의 사원과 탑을 조성해놓지 않았다면 붓다의 가르침이 제대로 전해지지도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그는 그때부터 아소카대왕에 대한 조명을 금생에 마치지 않으면 안 될 숙제로 삼았다.
‘발원이 간절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스승 법정 스님의 말대로 그는 마침내 일흔살에 대작을 마무리지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샘터출판사 편집자로 일할 때 법정 스님의 산문집 10여권을 낸 것을 계기로, 법명 무염을 받고 유발상좌(출가하지 않아 머리를 기른 재가 제자라는 뜻)가 되었다. 법정 스님이 종교를 넘어 그리스도인 함석헌 선생, 김수환 추기경, 이해인 수녀 등과 교유하며 평화와 공존을 도모했던 것처럼 아소카대왕이야말로 ‘평화와 공존의 지도자’라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아소카대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뒤 승가의 보호자와 믿음의 실천자임을 자임했지만, 그는 청정하기만 하면 모든 종교 수행자를 보호하고 존중했다. 그는 매일 아침 6만명의 수행자들을 궁으로 초청해 아침 공양을 올렸는데, 불교뿐 아니라 자이나교와 브라만교 수행자도 함께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또 아지비카교 교단엔 불교사원의 규모와 버금가는 동굴법당을 3개나 기증하기도 했다.”
정 작가는 “아소카대왕은 배고픈 사람들을 구휼하는 등 사람의 생명만 돌보는 데 그치지 않고 동물의 생명까지도 보호하기 위해 전국에 동물병원을 지었고, 전국에 세운 석주에 사람과 동물의 행복추구권과 복지와 자선정책을 새겨, 신본주의나 인본주의를 넘어선 모든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웠다”며 “외국에 전법사를 파견할 때도 종교를 앞세워 너희 나라를 정복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반드시 국경에 먼저 동물병원을 세웠다”고 전했다. 종교를 앞세워 정복을 일삼는 국가패권주의와 종교이기주의가 난무하는 요즘 더욱 되새겨야 할 ‘공존의 리더십’을 아소카대왕이 보여줬다는 것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