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현지 경허연구소장이 1월2일 새로 문을 열 경허기념관에서 경허 선사와 전봉준 장군의 인연을 설명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한국 종교뿐 아니라 세계 종교사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로 경허 선사(1849~1912)를 빼놓을 수 없다. 경허의 가르침을 받은 조계종 초대 종정 한암 스님이 ‘산과 같은 인물’이라며 존경했고, 만해 한용운이 <경허집>에서 조명했으며, 그의 이야기를 쓴 최인호의 소설 <길없는 길>은 150여만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경허는 주색잡기도 가리지 않는 파격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그 때문인지 그를 기리는 변변한 재단 하나 없다. 그런데 경허의 파격이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1855~95) 때문이었다는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그 주인공인 홍현지(65) 경허연구소장을 지난 2일 서울 조계사 앞 인사동 경허기념관에서 만났다. 그는 수백번 현장을 돌아다니며 추적한 자료를 바탕으로 쓴 ‘경허 소설’ 21권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경허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 새달 6일 경허기념관 개관식을 한다.
부모 때부터 존경·‘경허 사상’ 연구
박사 따고 연구소 열어 ‘전집’ 출간
2017년 우연히 경허의 친필문서 발견
“정혼한 여동생과 전봉준 ‘택일’ 의논”
“녹두 장군 주검 수습·자녀들 돌봐”
“서산 천장암에 녹두 장군 가묘 추정”
부모님의 영향으로 경허 선사 연구에 몰두해온 홍현지 경허연구소장은 무려 21권짜리 ‘경허 소설’도 출간할 예정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홍 소장은 한마디로 경허에 ‘미친’ 사람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20여년 일한 뒤 20여년간 영어학원을 운영하면서 동국대 대학원에서 경허의 선사상을 13년간 공부해 박사학위까지 땄다. 7년 전 서울 청담동에 있던 학원 건물에 경허연구소를 차리고, 사비 3억원을 들여 경허 연극까지 제작하고, 경허의 모든 자료들을 긁어모아 무려 71권의 ‘경허전집’을 냈다. 전북 완주 경허의 고향 마을 인근에서 태어나 경허를 부처님처럼 추앙하던 부모를 두었다고 해도 경허에 대한 그의 몰입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다. 그는 “중국의 고승들을 다 둘러봐도 경허만큼 깨달음의 경지를 걸림이 없이 자유롭게 보여준 인물이 없다”며 경허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해 애썼지만, 세상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 경천동지할 비밀에 접근했다. 불세출의 고승이자 근대 선불교의 초조인 경허와 한국 근대 민주화의 첫 새벽인 전봉준과의 관계였다.
“경허의 부친과 전봉준의 부친이 죽마고우여서 일찍부터 자식들의 혼인을 약속했고, 실제로 경허의 여동생과 전봉준이 결혼해 4남매를 두었다. 따라서 경허가 전봉준의 처남이고, 전봉준이 경허의 매제다. 동학농민혁명으로 교수형을 당한 전봉준의 주검을 부대자루에 넣어 도망친 것도 경허였다.”
이처럼 역사적인 두 인물의 관계는 우연한 계기로 발견됐다. “경허의 부친 송두옥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족보인 병술보가 뜨는데 송두옥이 전봉준의 장인으로 나온다. 동명이인가 보다 했는데, 어느 날 경허 선사의 친필이라는 문서가 발견됐다. 경허의 기존 글씨체와 닮은 그 글이 진본인지 서예가에게 감정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서예가가 ‘여동생 혼사에 대한 논의 글인데, 경허 선사가 무슨 여동생이 있고, 혼사에 관여했겠느냐. 경허 선사의 글일 리가 없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리칼이 송두리째 쭈뼛 일어섰다. 경허 선사에겐 두 여동생이 있었고, 3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서 출가한 뒤에도 절에서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았던 만큼 집안 대소사도 직접 챙겨야 했기에 부친의 친구이자 여동생의 시아버지가 될,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에게 혼사 택일을 의논하는 글을 보낸 것이다. 글 마지막엔 ‘사문 경허’라고 돼 있었다.”
경허와 전봉준의 관계를 더욱 확신하게 된 것은 둘의 고향 마을이 바로 옆 동네임을 알게 되면서다. “<경허집>엔 경허 선사의 고향이 전주 자동리(子東里)로 나온다. 그런데 전주·완주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그런 지명은 없었다. 필사하다 보면 우(于)를 자(子)로 잘못 쓸 수 있어서 ‘우동’을 찾아보니, 전북 완주군에 우동면이 있었다. 전봉준이 살던 완주군 봉상면 구미리 인근 마을인 우동면 구암리에서 경허가 살았음이 분명했다.”
홍현지 경허연구소장이 오는 2월 6일 개관식을 앞둔 경허기념관에서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홍 소장은 “전봉준의 거사 뒤엔 경허가 있었다”고 했다. 전봉준의 첫번째 부인인 경허의 여동생은 4남매를 남기고 23살 때 세상을 떴지만, 부모 대부터 이어진 경허와 전봉준의 관계는 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전봉준의 비서실장 격이었던 송희옥이 경허의 삼촌이었고, 사실상 전쟁을 하면서도 전봉준의 군율 첫번째가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 것’이라고 한 것도 불승인 경허의 불살생 가르침에 따랐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해석이다.
“전봉준이 순교한 뒤 오갈 데 없는 전봉준의 딸 전옥련을 독립지사 김대완이 주지로 있던 진안 마이산 고금당에 8년간 숨겨 돌보고, 전봉준의 아들 전용현을 동학도들이 많았던 전남 무안 배씨 집성촌에 보내 살게 한 것도 경허 선사였다. 그러나 전봉준과의 관계 때문에 경허 선사마저 3족을 멸하는 역적의 몸이 되어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니 대도인이었지만 시대적 울분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취광승(취하고 미친 중)이 되어 세상의 눈을 피하고자 했고, 결국 함경도 삼수갑산까지 가서 살며 김탁 같은 독립지사들을 길러내다 열반한 것이다.”
홍 소장은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여러 묘를 파보았지만 찾지 못하고 잇는 전봉준의 주검도 경허가 살던 충남 서산 천장암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봄이 되면 본사인 수덕사의 허락을 얻어 유족회와 함께 전봉준의 가묘로 추정되는 천장암 제비바위의 배씨 부도탑을 파보기로 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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