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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조현이만난사람

“우리 신화에 담긴 ‘공동체 묶어내는 힘’ 서사시로 풀어냈죠”

등록 2022-03-29 19:03수정 2022-03-30 16:13

[짬] 5년만에 새 시집 나해철 시인

‘물방울에서 신시까지 아침 새 빛의 나라’를 낸 나해철 시인. 조현 종교전문기자
‘물방울에서 신시까지 아침 새 빛의 나라’를 낸 나해철 시인. 조현 종교전문기자
단군 이전에는 누가 있었을까. 주변 강대국들이 역사 왜곡으로 옥죄어와도 역사에 대한 우리 상상력은 주눅 들지 않았다.

나해철(66) 시인이 우리 민족의 시원을 그린 <물방울에서 신시까지 아침 새 빛의 나라>(솔출판사)라는 거대한 신화 서사시를 들고 나왔다. 일연의 <삼국유사>가 드러낸 상고사 시기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한민족 창세 신화를 비롯한 인류의 시원을 그렸다.

지난 28일 나 시인을 그가 성형외과 의사로 일하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근처 병원에서 만났다.

막 수술을 끝내고 나온 나 시인은 먼저 기사에서 의사라는 걸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지 물었다. 직업을 밝히는 순간 시인의 정체성을 의심받는 게 싫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한국작가회의 이사를 지내고 ‘5월시’ 동인이기도 한 그는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거의 시를 잊어본 적이 없단다. 수술하고 잠시 짬이 날 때마다 메모장에 시를 끄적이는 메모광이기도 하다. 1980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담아 ‘세월호’ 이후 몇 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시를 써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게 쓴 시만 2000편이 넘는다. 그 가운데 뽑아낸 세월호 추모시집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을 내고 5년 만에 들고 나온 게 이 신화 서사시다.

“7~8년 전쯤 몽골의 게르에서 며칠을 지낸 적이 있다. 한겨울 게르촌에 홀로 머무를 때 알타이산맥의 끝자락이 멀리 아스라이 보이고, 말떼들이 초원을 달리고, 밤하늘 가득히 커다란 별들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별빛을 쏟아내는 모습이 신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밤이면 게르를 나와 초원을 산책하곤 했다. 깊은 밤 아무도 없는 초원에서 뭔가 소곤대는 소리와 말밥굽 소리도 들었다.”

이 시집은 마치 접신한 듯한, 몽골 초원의 그날 밤 잉태됐다. 신화 서사시에선 태초의 혼돈 상태에서 개벽이 이뤄지고, 물방울 거품에서 여신 마고가 태어난다. 그의 시에서 마고는 어떤 한 존재처럼 그려지기도 하지만, 천지자연이나 우주 그 자체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빛이면서 박동이고/ 소리이면서 고요이고/ 말이면서 노래이고/ 생각이면서 의지이고/ 자비이면서 은총이었던/ 본래의 그 무엇에서/ 솟구친 청이슬과 흑이슬이 지닌/ 강력한 생명이 힘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생명의 탄생과 보살핌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위대한 자비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나해철 시인. 조현 종교전문기자
나해철 시인. 조현 종교전문기자
우리 민족의 시원 다룬 시집
‘물방울에서 신시까지…’ 펴내
몽골 게르에서 머무를 때 착상

“마고는 제우스보다 근원적 신
시 쓰며 조상의 지혜로움 탄복
코로나로 힘든 이웃에 힘 되길”

신라 학자 박제상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상고사의 비서인 <부도지>뿐 아니라 제주도의 설문대할망 설화를 비롯해 우리나라 각지에서 전해 내려온 신화와 설화, 무가에서 그려진 창세 신화를 모태로 한 마고는 <구약성서> 야훼나 그리스신화 제우스보다 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신으로 그려진다.

“홍익인간이나 재세이화 같은 건국이념을 지닌 우리 건국신화는 너무도 완벽하다. 그러나 우리 신화에서 우주와 세계의 시작을 묘사한 창세 신화가 풍부하지 못한 것이 늘 안타까웠다. 아주 옛날 우리 민족의 주류가 대륙 동쪽으로 이주하면서 창세 이야기를 길 위에 남겨두고 온 것이 아닐까. 집안의 5대 이상 아주 윗대를 모시는 시향 혹은 시제는 먼 고향에 그대로 두고, 바로 가까운 윗대 어르신들의 제사만 자기 집으로 가져와 모시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신화 서사에 꽂힌 것은 공동체성이 사라지는 데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한편으로 한류가 융성하지만, 남북분단은 갈수록 고착화하고 빈부 격차로 계층도 갈수록 나뉘고 흩어져가고 있다”며 “함께 이야기하며 나눌 서사와 신화가 있을수록 공동체가 오래 지속하고, 고난을 겪어도 서로 협력해 더 쉽게 극복하고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여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 붐이 일었던 신화 읽기와 신화 공부 모임에 참여했던 수많은 이들의 무의식에도 그런 여망이 있었으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우리 민족의 시원을 더듬어갈수록 우리 조상들이 어디를 가든 지도적인 구실을 했을 만큼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음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틈만 나면 걷는 걷기광인 나 시인은 그리스도교나 불교의 기도문을 외고 걸으며 그 지혜를 시어로 길어 올리곤 했다. 그 지혜의 시엔 고난에 스러지지 말라는 어머니 같은 자비로움이 담겨 있다.

‘자연을 보라/ 고요히 생각을 모으는 일에 전부를 걸고/ 다만 운율에 맞추어 소리 없이 몸을 바꾸는/ 자연에서 배우라’거나 ‘잠시라도 틈을 보이면/ 합당치 않는 두려움과 과도한 욕망은 파고든다/ 헛된 욕심과/ 괜한 두려움에/ 너와 세상의 평화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들이 그렇다. 또 시는 ‘너여/ 결코/ 혼자가 아닌 너여/ 함께 가라/ 네가 경계 위에 있어도/ 네가 슬픔 안에 있어도/ 혼자가 아니다/ 모든 것이 너와 함께 있다/ 너와 함께 있다/ 외로워 말라/ 혼자인 것은 결코 여기에는 없다’거나 ‘불행에게 싸움을 걸지마라/ 불행이 허공에 발을 디뎌 뚝 떨어져 사라질 때까지/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 불행을 이기는 방법이다’라며 아픔을 달래준다.

“연극 하는 아들이 있는데, 코로나로 상황이 어려워 연출가를 비롯한 동료 몇 명이 생을 포기했다. 아들도 너무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힘들어하고 외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에게도 힘을 주고 싶었다. 천손 족인 우리에겐 하늘의 밝은 빛을 닮아 자연을 신으로 귀하게 여겨 감사하며, 춤과 노래로 고난을 잘 이겨내며 삶을 즐기는 힘이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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