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가로 활약했던 젊은시절의 지암 이종욱 사진 <한겨레>자료
조계종단을 재건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조선불교조계종’(조계종의 옛이름)의 초대 종무총장(총무원장의 옛이름) 이 지암 이종욱 스님(1884~1969)이다.
그는 항일운동가라는 영광의 월계관과 친일반민족행위자란 굴욕의 굴레를 동시에 쓰고 있는 인물이다. 13세에 출가한 지암은 오대산 월정사에 머물던 중 3·1운동을 계기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을사오적 매국노를 제거하기 위해 조직된 27결사대에 참여한데 이어 한성임시정부 수립 때 불교계 대표로 함께했다. 이어 상해임시정부 특파원으로 국내 항일조직과의 연락과 정보 수집, 독립자금 모금 등을 담당하며 내무부 참사, 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다 일경에 체포돼 함흥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지암은 1930년대 후반 조계종 총본산 건설운동 때는 31본산주지대표를 맡아 태고사(현 조계사)를 창건하고 조선불교 조계종을 재건했다. 또 농지개혁 조치로 몰수당할 위기에 처한 전국 사찰의 토지를 돌려받는 것과 함께, 조계종립대학인 동국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는데도 기여도 했다.
하지만 지암은 총독부의 인가로 1941년 5월1일 출범한 조계종의 종무총장에 히로다 쇼이쿠란 창씨명으로 취임했다. 그는 그해 12월 8일 대동아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전 조선 1500여개 사찰에 (일제의) 전쟁승리를 위한 기도법회를 열게하고, 전국사찰에 군용기 헌납기금 5만3원을 내도록 본말사별로 할당해 징수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지암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됐다.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 지암 이종욱 스님
이런 지암을 새롭게 조명하는 책이 출간됐다. ‘조계종의 산파’란 부제를 붙인 <지암 이종욱>(조계종출판사 펴냄)이이다. 저자는 출가자가 아님에도 총무원을 지탱하는 재가자 터줏대감들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는 박희승(47) 총무원 문화부 차장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지암의 친일과 항일행적을 담으면서 변호자로 나서 ‘지암의 친·반일 논쟁’을 재연시키고 있다. 저자는 총무원 불학연구소 연구과장으로 재직할 당시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으로 국가훈장을 받은 이종욱 스님이 친일파로 비판 받는데 대한 조계종단의 의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후부터 지암을 연구해왔다고 한다.
저자는 “지암이 조선 불교도의 오랜 염원인 총본산 건설과 교단 재건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31본산 주지대표와 종무총장을 맡아 오욕을 감수했다”고 주장한다. 지암이 일제말 한 친일행위도 실은 독립운동을 위한 ‘위장 친일’이었다는 변호다. 지암이 은밀히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조달하고, 일제말기인 1944년에도 국내에서 독립운동가들과 미밀부장봉기를 모의하였고, 백범 김구가 귀국하자 마자 제일 먼저 찾은 인물이 지암이었다는 점 등을 ‘위장 친일’의 근거로 들고 있다.
저자는 “무작정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여 다른 모든 성과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라며 “지암 스님이 남긴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지암에 대한 정부의 서훈은 취소돼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사리도 올해 대흥사로 이전됐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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