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전 총무원장 월주 스님이 22일 열반했다. 법랍 67살, 세수 87살.
월주스님은 이날 오전 9시 45분께 자신이 조실로 있는 전북 김제의 금산사에서 입적했다. 고인은 올해 폐렴 등으로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오전 금산사로 자리를 옮겨졌다.
1935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스님은 서울 중동중학교에 다니다 한국전쟁 발발로 중퇴하고 낙향해 정읍농고 2학년에 재학 중인 1954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당대의 선지식인 금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는 대처승을 몰아낸 정화운동에 참여해 분규 중이던 금산사를 접수해 불과 26살에 주지를 맡았다. 금산사는 전북 일대를 총괄하는 교구 본사다. 그는 금산사에서 10년간 주지를 한 뒤 30대 때 조계종 개운사 주지, 총무원 교무·총무부장, 중앙종회의장 등 종단의 주요 소임을 맡아 활동했다. 그는 서울 중곡동 아차산 영화사 회주로서 아차산에 머물며 활동했다.
고인은 신군부가 집권한 1980년 제17대 총무원장에 선출됐으나 전국 사찰이 군홧발에 짓밟힌 ‘10·27 법난’ 때 강제 연행됐고, 취임 6개월 만에 총무원장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끌려가 23일간 고초를 겪고 원장직을 물러나야 했다.
고인은 이후 미국 등지를 다니다 귀국해 시민사회운동에 나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1989년),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1990∼1995),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1996),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1998) 등을 지냈다.
고인은 그의 상좌인 도법 스님과 현응 스님 등의 주도로 3선 연임을 강행하던 서의현 체제를 뒤엎은 1994년 ‘종단 개혁’ 이후 총무원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1998년 월주 스님이 총무원장 재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종정 월하 스님과 갈등을 빚어 사퇴했다. 1994년 서의현 스님의 총무원장 3선 연임을 저지하며 개혁한 ‘조계종 개혁회의’는 ‘총무원장은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고 종헌에 명시해 월주 스님은 총무원장에 출마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그는 ‘1980년 6개월간 재임한 17대 총무원장직은 10·27법난으로 강제로 물러난데다, 1994년 종헌 개정 이전 상황이기 때문에 소급해 적용할 수 없다’며 출마를 공식화해 파장을 불러왔다.
그는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 북한 동포의 기아 상태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발족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로서 8년 동안 북녘 동포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 앞장섰다. 또 1998년 구제금융 위기로 실업 대란이 발생하자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 등과 함께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를 발족시켜 활동했다. 그는 2003년부터 지구촌공생회라는 구호단체를 만들어, 마실 물조차 없어 고통받고 있는 캄보디아에 우물 1600여개를 파고 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미얀마·캄보디아·라오스·몽골·네팔·케냐 등 6개 저개발국에서 교육 및 주민 생활환경 개선 사업에 심혈을 쏟았다. 이런 헌신적 활동으로 1990년대 말부터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와 함께 ‘종교 지도자 삼총사’로 불리며 불교계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고인은 1992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나눔의집을 설립해 대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나눔의집 운영진이 후원금 중 일부만 피해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등의 문제가 불거지기도했다.
현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 실상사 회주 도법 스님, 금산사 회주 도영 스님 등이 그의 상좌다.
장례는 5일간 금산사에서 조계종 종단장으로 치러진다. 영결식과 다비식은 26일에 있을 예정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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