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적명 스님이 경북 문경 희양산 관음봉에서 실족사해 열반했다는 비보에 불자대중들은 슬픔에 잠겼다. 특히 가장 큰 충격을 이들은 깨달음을 위해 몸을 던진 수좌들이었다. 적명 스님은 ‘영원한 수좌’, ‘수좌들의 맏형’으로 불릴만큼, 수좌계의 사표였기 때문이었다.
그 적명 스님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16명의 스님과 속가 동생 등 17명이 적명 스님을 회고한 인터뷰집이 출간됐다. 인터뷰는 평소 봉암사로 적명 스님을 자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던 유철주 불교작가가 맡았다. <적명을 말하다>(사유수 펴냄)이다.
적명 스님과 각별했던 전 망월사 천중선원장 허담스님은 적명 스님은 열반하시기 보름 전쯤 산행을 하다 만난 한 스님에게 사고 지점을 가리키면서, ‘젊어서 정진할 때 가끔 올라가서 수행하던 곳’이라고 하면서 ‘내가 저기에 한번 가볼까 한다’고 했다는 후일담을 전한다. 또 적명 스님의 상좌인 안양 선우정사 주지 선타스님은 열반 후 적명 스님의 유품을 정리하다 방 서랍에서 발견한 방거사의 임종게를 전해준다.
‘온갖 있는 것 비우기를 소원할지언정 없는 것을 채우지는 말아야 한다./잘 계시라. 세간은 모두가 메아리와 그림자 같다.’
이런 회고들은 누구보다 깔끔했던 적명 스님이 이미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중이었다는 느낌이 들게한다. 제주 태생인 적명 스님의 속가 동생인 김동호 거사(전 제주오라초등학교 교장)에 따르면, 적명 스님의 조부는 1909년 제 의병항쟁이 주역이자 스님이었던 김석윤 스님이고, 아버지도 스님이었다. 그가 출가 결심을 어머니께 말했을때 ‘네가 출가하면 나는 죽는다’고 하니, ‘그럼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무덤 만들어 놓고 출가하겠다’고 해서.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해 출가를 결행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 17명이 회고하는 적명 스님은 그 초발심을 한시도 잊지않은 철저한 한 수행자다. 특히 누구보다 수행에 철저하면서도, 수행과 삶이 다르지않은 적명 스님의 진면목이 감동을 준다. 17명이 말하는 적명 스님의 모습을 4가지 측면으로 정리해본다.
◇수행
전국선원수좌회 상임대표 의정 스님은 1960년대 종단 정화시절 상당수의 선사들이 종단행정에 참여하자 그분들을 대신해 적명스님이 20대말부터 선원을 이끌었는데, 당시 전국의 선원에서 대표적으로 수행 잘 하는 수좌로 적명 스님과 무문 스님이 꼽혔다고 한다.
경북 봉화 축서사 문수선원 선원장 무여스님은 젊은시절 해인사 선방에서 정진할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성철 스님이 가끔 경책하러 내려오시면 대중들 중 누군가 ‘오신다’, ‘오신다’하면 바짝 긴장하고, 성철 스님의 죽비가 마치 콩이 튀듯이 춤을 췄다.” 그러나 적명 스님은 누가 볼 때나 보지않을 때나 시종일관 여일하게 정진했다고 한다.
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 스님은 적명 스님과 같은 제주도 출신에 고교 후배다. 적명스님이 출가한 이후 고향에 찾아왔을 때, ‘스님은 뭐하는 사람이에요 라고 물었을 때 ‘스님은 부처님의 길을 배우고, 부처님의 길을 행하는 사람이다’고 답했던을 기억한다. 혜국 스님은 또 “적명 스님이 통도사 인근 천성산에 손수 지어 전기도 없이 작은 비로토굴에서 살 때 오랜 기간 한 길로만 포행을 해서인지 마당에 반질반질하게 일자 모양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면서 10여년을 홀로 토굴에서 외로움과 싸우면서도 한시도 방심치 않았던 수행자 모습을 전해준다. 한번은 은해사 기기암선원에서 후학을 제접할 때. ‘내가 곧 70세가 되면 공식적으로 환계하고 자유롭게 비승비속으로 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혜국 스님은 “태평성대라면 몰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 스님 같은 분이 중심을 잡아주지않으면 누가 합니까. 절대로 반대다”고 했다고 한다. 혜국 스님은 “아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야인으로 돌아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회고한다. 적명 스님은 그 후 봉암사 수좌로 추대돼 봉암사에서 열반을 맞았다.
혜국 스님에 따르면 적명 스님은 일관되게 ‘강사는 경을 설하다 죽어야 하고, 법사는 법문을 하다 죽어야 하며, 수좌는 오직 좌복 위에서 화두를 들다 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또 누가 한 소식 했다며 거량하자고 하면, ‘나는 관심 없어’라며 다 말장난이라고 생각했고, 불교의 이론을 꿰뚫고 있었지만 확철대오 전에는 다 부질없다고 여겼다고 한다.
서울 보문사 주지 지범 스님은 해인사에서 1982년 동안거부터 1984년 하안거까지 4번의 안거를 해인사에서 보낼 때, 선원 대중들은 새벽 2시에 정진을 시작해 밤 10시면 마치고 잠을 잤는데, 적명 스님은 새벽 1시30분이면 어김없이 선열당 앞에서 포행을 시작해 2시에 대중들과 같이 않았고, 2년동안 단 하루도 이 일과를 어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했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 선원장 영운 스님은 적명 스님이 전한, 참선공부의 경책을 일러준다.
“이 공부는 급하게 마음먹으면 안된다. 대해수를 바가지로 퍼내듯이 공부해야한다. 펑퍼짐하게 주저앉아서 한 바가지 한 바가지 정성껏 퍼내야 한다. 그렇게 꾸준히 하다 보면 대해수가 뒤집어질 날이 반드시 온다. 대해수가 뒤집어지는 그 순간 공부에 큰 변화가 올 것이다.”
해인사 결제 해제 기념 사진. 맨아랫줄 가운데가 성철 스님, 오른쪽으로 혜암 스님,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적명 스님이다.
◇하심
적명 스님은 조계종 유일의 비구 특별선원은 봉암사의 조실로 선승들이 모시자, ‘깨닫지 못했다’며 기어코 조실자리를 거부하고, 수행자인 ‘수좌’로 남았다. 그러나 봉암사에서 사실상 조실 구실을 해 후학들의 수행을 지도했다.
해인총림 유나 원타 스님은 “적명스님께서는 철저하게 대중생활을 했고, 특별한 대접을 받겠다는 생각이 추호도 없어서 큰방에서 같이 정진하고 함께 울력하고 공양도 같이 했다”고 회고했다.
중진스님들이 상좌(제자)를 받는 것은 당연시됐음에도 적명 스님은 상좌를 두지 않았다. 상좌 선타 스님은 1982년 해인사 선원장이던 적명 스님의 눈에서 빛이 쏟아지는 카리스마를 보고, 상좌가 되고 싶어 찾아갔지만 ‘나는 상좌 안둔다’고 일언지하에 거절 당했던 일화를 전한다. 선타 스님은 자신이 적명 스님의 상좌가 됐다고 먼저 소문을 내고 다녀, 결국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
◇진솔
적명 스님은 앞과 뒤가 다르지않고, 진솔했기에 후배 선승들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적명 스님은 전남 나주 다보사의 우화스님에게 출가했다. 우화 스님은 자신을 못난이라고 할만큼 배운 것이 없고, 빈한하게 살았지만, 견처가 있어서 ‘숨은 도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불교세가 약한 전라도에서 근근이 절살림을 꾸려갔기에 상좌들을 제대로 보살필 처지도 못되었다. 우화스님은 적명스님이 30대 중반에 불과하던 1976년 입적했다.
조계종 원로회의 수석부의장 대원 스님에 따르면 성철, 경봉, 월하, 서옹 스님 등 내로라하는 스님들이 일찌감치 인정한 그릇이었고, 어떤 스님은 적명스님을 상좌로 삼고 싶어했지만 적명 스님은 ‘그것은 수좌의 도리가 아닙니다’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성철 스님의 법을 선양하기 위한 백련불교문화재단의 이사장 원택스님의 회고에서도 적명 스님의 진솔한 성정이 드러난다. 어느날 적명스님이 원택 스님에게 고백했다고 한다.
“나는 성철 스님을 신(信)하지 않네”
“무슨 말씀입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큰스님께서 돈오돈수를 말씀하시는데 나는 돈오점수를 하는 사람이야. 그리 알고 나를 이해해줘.”
후에 적명 스님은 “성철큰스님은 돈오돈수를 하시면서도 돈오점수를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원택스님은 적명 스님의 솔직한 토로가 오히려 좋았다고 회고했다.
봉암사에서 왼쪽부터 수좌 적명 스님, 주지 원타 스님,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다.
◇삶
지범 스님은 비로토굴에서 적명 스님이 매일 두시간씩 나무를 하기에 왜 그렇게 나무를 많이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적명 스님은 다음에 이곳에 올 스님이 다 땔수 있도록 장만해두는 거라고 했다고 한다.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영진 스님 회고. 스님도 양심적이며 실천적인 적명 스님의 면모를 전해준다. 적명 스님이 오래 머문 팔공산 기기암은 계곡물을 물탱크에 저장해두었다가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했는데, 적명 스님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직접 관리할만큼 궂은 일은 본인이 하고, 대중들은 정진에만 힘쓰도록 했다고 한다. 또 적명 스님은 항상 분배는 평등해야한다고 했다. 어느 선방은 해제비가 많고 어느 선방은 적은 것은 못마땅해 기기암 해제비가 많은 것은 아닌데도 상한선을 정해서 해제비를 주고 남은 돈은 형편이 어려운 선원에 보내자고 했다는 것이다. 영진 스님은 “적명 스님이 ‘정진이 끝나면 바랑을 싸서 떠나는 자유로움, 항상 깨어있는 마음이 얼마나 좋으냐고 했다”며 적명 스님을 ‘존경 받아야 할 운수납자의 표상’이라고 표현했다.
해인총림 방장 원각 스님은 “적명스님은 어른스님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얘기를 잘했고, 나이 40도 안돼 유나로 추대될만큼 정진을 잘했다”며 “1970년말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만났을 때 ‘우리 수행자가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수행자다워야 한다. 남이 인정할 수 있고 남이 존경할 수 있고,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 말을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적명 스님은 꾸밈이 없고 안팎이 없었고, 수행면에 있어서나 일상 생활에서 내면에 단단한 쇳덩어리처럼 분명한 당신만의 세계가 있었다”고 평했다. 원각 스님은 근자에 적명 스님의 중도법문도 이렇게 소개했다.
“중도는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너도 사랑하니 중도는 사랑이란 것이었다.”
의정 스님은 산속 수행자이면서도 불의에 타협하지않고, 종단의 불의한 모습을 보면 몸을 사리지않고 직언하며 바르고 정의로운 일에 망설임 없이 실천한 적명 스님의 또 다른 모습을 전한다. 또 적명 스님은 아파도 병원비조차 없는 선승들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기기암에 머물 때 대중스님들과 모은 4100만원을 쾌척해 수좌복지회의 종잣돈을 마련해줬다고 한다. (사)평화의길 이사장 명진 스님도 몸이 아파서 고생을 하는 한 수좌에게 적명 스님이 천만원을 준 일화를 소개한다. 또 봉암사 선방에서 온갖 사고를 쳐서 대중생활이 안돼 대중들이 참다못해 그 스님을 내보야한다고 여러 번 간청하는데도 적명 스님은 꿈쩍도 안하며 ‘여기서 내보래면 저 스님은 어디서 살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열림
통상 선승들은 간화선제일주의에 따라 다른 남방불교나 티베트불교 등 다른 수행전통을 폄하하기 일쑤다. 따라서 그들과 열린 토론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적명스님은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공부하고 메모해서 후배들과 격의 없는 토론을 벌이곤했다고 한다.
서울 전등사 전등선림선원장 동명스님은 적명 스님이 남방불교 수행지침서인 <청정도론>을 읽은 뒤 선방의 어른이 주저 없이 후배들에게 토론을 청하고 자신의 공부를 확인받고자 하는 모습이 파격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지리산 실상사 회주 도법스님은 수좌로서 여전히 전통적인 깨달음의 수행관을 중요시한 적명스님에 대해 ‘의심과 비판’의 시선으로 끊임없이 묻고 따졌다고 한다. 보통 초저녁에 만나 공양을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음날 아침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함께 했던 사람들이 다 떠나도 아랑곳하지않고, 둘은 끝까지 남아 이야기를 했고, 나중엔 젊은 도법 스님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명 스님의 태도와 의지는 단단했다고 전한다. 도법 스님이 때로는 거칠게 물고 늘어져도 적명 스님은 후배의 도발을 마다하지않고 받아주었다는 것이다.
도법 스님은 “깨달음을 위시한 무거운 주제들을 허심탄회하게 묻고 따지고 생떼를 부려도 괜찮은 스님이 여기에 안 계시다는 사실이 참으로 온 세상이 텅 빈 느낌”이라고 말했다.
서울 참불선원장 각산 스님은 세계적 명상가인 아잔브람 스님을 한국에 초대해 한국의 대표적인 선지식과 토론회를 준비했을 때, 대부분의 선승들이 마다한 일을 적명 스님이 받아들인 일화를 소개했다. 아잔브람은 봉암사에서 적명 스님과 대화를 한 뒤 적명 스님에게 3배의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각산 스님이 대화 소감을 물어보자 아잔브람은 적명 스님에 대해 ‘선사의 모든 면모를 갖춘 분이다. 수행에 있어서의 날카로움과 대중들을 제접함에 있어서의 부드러움을 두루 갖췄다”고 극찬했다고 전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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