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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마음산책

이희호 김대중의 다른종교

등록 2019-06-12 15:54

 이희호 여사와 남편 김대중 전대통령은 종교가 달랐다. 이희호는 개신교인 감리교 신자였다. 김대중은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같은 신을 섬기지만, 배타성이 강한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을 이단시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둘은 1962년 결혼 이후에도 신앙을 한쪽으로 합치지않고, 서로 다른 신앙을 유지했다. 그래서 매주 일요일이면 이희호는 서울 동교동 집에서 가까운, 연세대 정문 건너편 창천감리교회에 가고, 김대중은 홍대 인근 서교동성당에 갔다. 그리고 점심 때면 부부가 홍일·홍업·홍걸 3남매 부부 및 손주들과 식사를 했다. 식사 전에도 김대중은 천주교식으로 성호를 그었고, 이희호는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했다.

 둘은 만나기 전에 이미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하더라도 그토록 애틋한 부부애와 존경을 지니고 산 부부가 왜 이렇게 ‘다른 종교’라는 불편을 감내하고 평생을 지냈을까. 아무리 가까워도 천부적 인권과 신앙에 대해서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려하지않는 특별한 두 사람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보자면 이희호가 김대중보다 선배다. 이희호는 모태신앙이었다. 어려서 충남 서산에서 의사인 아버지가 병원을 운영해 서산국민학교를 다닌 이희호는 서산국민학교 후문 근처의 서산감리교회에 다녔고, 학업상 서울에서 이화고녀에 다니면서 서산에 내려오면 교회에서 살다시피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희호는 이화여고, 이화여전, 서울대 사범대학, 램버스(Lambuth) 대학, 스캐릿(Scarritt) 대학  등 서울대를 빼고는 모두 감리교 학교를 다녔다.  그는 서산지역 잡지인 <갯마을>과 인터뷰에서  “크리스마스 때 연극을 한 일, 논두렁 밭두렁을 타고 새벽에 먼데까지 다니며 크리스마스 캐롤송을 부른 일, 음악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동화구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서 상으로 시계를 탄 일, 추수 감사제 때 물품 수집을 해서 경매를 해 가지고 그 수익금으로 생활이 어려운 이들을 도운 일 등이 즐거운 기억들”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이화고녀의 학생 예배에도 사회를 보는 등 종교 활동에 열성적이어서 40년 3월에 이화고녀의 ‘종교상’을 수상했는데, 그때부터 단상에 서는 일이 익숙해졌다고 한다. 그는 어린 시절 서산의 순수한 신앙인들이 모인 시골교회 풍경을 늘 그리워하면서, 대형교회들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기독교 단체로 와이엠시에이(YMCA)와 함께 대표적인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의 대표격인 총무를 지냈다. 한국 개신교 여성의 얼굴격이었므로 그가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1972년부터는 창천감리교회 주일학교 교사를 했고, 장로로 시무했다.

 김대중은 1957년 7월 13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청 노기남 주교의 집무실에서 윤형중 신부의 주례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대부는 훗날 총리를 지낸 장면 박사였다. 목포의 청년사업가이자 신문 경영자였던 김대중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에서 출마해 낙선해 상경한 뒤 1956년 민주당 신파에 입당해 장면과 인연을 맺고 가톨릭 세례까지 받게 된다.

민주당 신파는 가톨릭으로 신익희-장면-박순천-김대중이 가톨릭이고, 민주당  구파는 조병옥-윤보선-유진산-김영삼-상도동 가신으로 개신교 쪽이었다. 동교동 가신들도 개신교인 한광옥  등 몇명을 제외한 핵심들은 김대중을 따라 가톨릭 세례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됐다. 김대중의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를 쓴 정치가이자 인문주의자로서 반역죄로 몰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가 훗날 성인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김대중은 자신의 세례명이 토마스 모어로 정해지자 “‘왜 하필 목 잘린 사람의 이름을 내 세례명으로 지어 주는가’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고 자서전에 회고했는데, 그는 세례명대로 그 이후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야했다. 

 김대중은 연이어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가운데 아내 차용애 여사가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대부 장면에 의해 야당 대변인으로 발탁된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1962년 결혼을 하는데, 이희호는 주위의 반대에 부딪친다. 그도 그럴 것이 김대중은 국회의원도 아닌 고졸 출신의 정치 지망생에다 이미 상처를 하고 홍일 홍업 .두 아들과 어머니와 함께 대신동의 월세방에서 살고 있었고, 이희호는 부친과 오빠가 의사인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처지였다.

 이희호는 훗날 “김대중씨는 그때에도 촌음을 아껴가며 많은 독서를 하였고, 거기서 얻은 지식을 관념이나 추상적인 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응하려는 실천적 의지와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지니고 있는 꿈이 그저 꿈으로만 끝나지 않으리라는 신뢰를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하게 느꼈다. 그의 신념과 관용과 멋에 이끌려, 그리고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이런 험고를 마다하지않는데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타라와 같은 주체적 선택을 할 수 있는 1세대 페미니스트였던데다 크리스찬으로서 진취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식은 무일푼의 처지인 김대중보다는 처지가 나은 이희호쪽의 주도로 개신교식으로 진행됐다. 결혼식 때 청접장은 내지 않고 가까운 지인들과 이희호가 이끄는 와이더블유시에이 직원들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희호의 외삼촌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 창립자 중 한명인 경제인 이원순선생의 제부동 넓은 한옥에서 치러진 결혼식 주례는 조향록 목사가 맡았다.

 

 이희호와 김대중에게 그리스도 신앙은 무엇이었을까. 현대 한국 기독교에서는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예수 믿으면 물질 구원, 건강 구원, 영혼 구원을 동시에 다 받을 수 있다’면서 기복적 축복 신앙이 풍미했다. 그처럼 개인적인 복을 받는다는 차원의 신앙은 모든 종교의 가장 낮은 차원의 선교·포교 전략에 해당되지만, 이는 고등종교들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고난을 상징한다. 또한 고난과 시련을 자처하면서도 구원으로 가는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해 강고한 독재와의 지난한 싸움이라는 고난을 자처하며, 민주화와 인권, 평화의 새 길을 열었다. 김대중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신앙이 더욱 다져졌다. 

 김대중은 대통령직을 마친 뒤 <기독교방송>과 가진 특별대담에서 ‘1973년 일본 도쿄에서 납치돼 현해탄 바닷물에 던져지기 직전, 죽음을 예감했지만, 바로 그 순간 예수를 만났다’며 이렇게 고백했다.

 “밧줄을 뜯을 수가 없나 손에 힘도 줘봤어요. 그 때 갑자기 예수님이 옆에 서시더라고요. 그래서 예수님 소매, 로브를 붙잡고 예수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제가 국민들에게 할 일도 많다고 기도했죠. 그 때 그 순간 펑소리가 나요. 펑소리가 나니까 나를 묶었던 정보부원들이 ‘비행기다’하면서 뛰어나가요. 그래서 거기서 예수님을 실제로 뵈었는데 그 순간이 내가 산 순간이었어요. 그 때 조금 늦었으면 바다에 던져져 못 산거거든요. 너무도 우연의 일치로 됐는데 나는 확실히 예수님으로 믿어요.”

 김대중은 이를 계기로 “80년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도 이런 신앙의 힘 때문에 흔들림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80년대 초 죽음의 위기 속에서 이희호에게 보낸 29통의 편지를 보면 그의 독실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1980년 9월 13일 사형언도를 받고 보낸 편지들에는 마치 유언을 하듯 절절한 내용이 이어졌지만, 글의 절반 이상은 예수 부활과 신앙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것이 현재 나의 믿음을 지탱하는 최대의 힘이며, 언제나 눈을 그분에게 고정하고 결코 그분의 옷소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당시 노르웨이 국왕 등 수많은 대중들이 참석하고, 전세계에 생중계되는 장엄한 분위기의 수상식 연설에서 마지막에 ‘저 개인에 대해 말씀드리겠다’며 신앙 간증을 이렇게 했다.

 “존경하는 국왕폐하 그리고 신사숙녀 여러분. 마지막으로 저 개인에 대해서 잠시 말씀 드릴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저는 독재자들에 의해서 일생동안 다섯번이나 죽을고비를 넘겼습니다. 6년동안 감옥생활을 했으며, 40년간 연금 망명 감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속에 살아오고 있으며 실제로 체험을 했습니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 망명하고 있을 당시 한국 군사정부의 정보기관이 저를 납치하였습니다. 전세계가 긴급뉴스에 경악을 금치못했습니다. 한국정보기관이 일본 해안에 정박을 하고 저를 그들의 공작선으로 끌고가 전신을 결박하고 눈과 입을 막았습니다. 그런 저를 바다에 수장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때 저의 머릿 속에 예수님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붙잡고 살려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를 구원하는 비행기가 와서 저를 죽음의 찰라에서 구원하였습니다.”

 이희호도 그 고난의 기나긴 시절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다.  그는 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창천교회에서 매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또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고난 받는 자들을 위한 목요기도회’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특히 고난의 시기에 새벽기도와 가족기도회를 가졌으며, 금식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이희호의 철저한 기도생활은 가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최근 이희호에 앞서 세상을 떠난 장남 김홍일은 <나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는다>란 책에서 “어머니를 건강하게 그리고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준 것은 기독교였다. 어머니는 굳건히 선 채 온몸으로 기도하셨다. 이때부터 나도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깊은 기도를 드리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희호는 1980 11월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사형을 선고 받은 남편을 면회하면서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내 기도로서 평정을 회복했고,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김대중은 훗날 “내가 죽어도 (집사람은)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니 서운합디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희호는 남편이 감옥에 있을 때 남편이 차디찬 감옥에서 사형수로 있는데 자기만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는 없다면서 자기 방에 난방을 하지못하게하고, 찬방에서 겨울을 나며 기도를 날을 지새웠다고 한다.

 김대중은 한 대담에서 ‘바른 기독교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란 물음에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이 곧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고 했다. 이 때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하고 그들에게 많이 베푼 사람에게 상을 준다고 했다. 그게 바로 기독교의 정신이고 또 바른 기독교관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만의 욕망만을 채우려는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약자들을 구원하려는 신앙으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꿰뚫고 실천하려 애쓴 것이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역대 대통령 부부 가운데 가장 독실한 신앙인이었지만, 그리스도교 이외 불교와 민족종교 등 모든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열린 태도로 이웃종교인들로부터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 부부로 기억되고 있다.

 그토록 독재로부터 악랄한 핍박을 받았으면서도 화해와 비폭력, 평화 외엔 남남과 남북이 화합과 통일로 가기 어렵다고 보고, 신앙의 힘으로 용서하고 피해자임에도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평화를 실천한 김대중과 이희호는 사랑과 평화라는 그리스도의 본질을 삶에서 구현한 셈이다. 또한 이희호는 수많은 배신과 핍박의 삶을 헤쳐오면서도 한번도 사람을 먼저 내치지도, 화를 내지도 않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일관했다고 주위 사람들은 전한다. 사회운동가, 여성운동가, 영부인으로서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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