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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마음산책

총 내리면 우리는 같은 인간

등록 2019-03-26 17:18

 ‘얼마나 긴 길을 걸어야 인간이 인간으로 불려질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전쟁터를 날아야 포탄이 없어질까/ 얼마나 더 죽어야 인간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까.’ 반전 가수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의 가사처럼, 상흔의 현장을 찾아 걸으며 묻고 돌아온 이들이 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단’이다. 서울 인수동과 강원도 홍천에서 마을공동체를 일구어 함께 살고 있는 ‘밝은누리’를 중심으로 한 순례단은 21일 순례기를 들려주며 여전히 먹먹한 느낌을 전했다. 
  
 순례단 70여명은 지난 14~19일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마을인 하미마을과 퐁니·퐁넛마을을 찾아 희생자 가족들을 만났다. 1968년 2월25일 135명이 숨진 하미마을에서는 한국 군인들이 사탕을 나눠준다며 주민들을 모아놓고 총을 난사한 뒤 탱크로 밀어붙이고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불까지 질렀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었다. 순례단은 “늘 일제에 대한 피해자의 입장으로만 분노하다가 가해자의 입장으로 그들을 대면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니 감히 ‘용서’나 ‘치유’ 같은 걸 언급할 수도 없었다.

증언자로 나선 이는 전후 이 마을에서 밭을 일구다 지뢰가 터져 두 눈을 실명한 응우옌럽이었다. 그는 당시 참상의 현장에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어머니 팜티호아가 생전에 늘 ‘증오심을 벗어나 해원해야 한다’고 했다는 말을 전해주고는 순례단의 기도회에 함께했다. 순례단은 처참했던 아픔을 지닌 그들을 바로 볼 수 없어 찬송하며 기도했다. 그 기도의 응답인 듯한 말을 한 이는 반레 시인이었다. 한국에도 번역 소개된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이란 장편소설의 작가이자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그는 베트남전에서 부대원 300명 대부분이 죽고 살아남은 5명 중 하나다. 반레는 그때 죽은 전우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합친 새 이름이다. 그런 그의 눈에 증오심이 아닌 평화가 영글어간다는 게 희한한 일이었다. 반레 시인은 늘 어머니가 들려주었다는 말을 전했다. 그의 어머니는 “네가 적을 향한 총구를 거둬들일 때 거기엔 적이 아니라 단지 한 인간이 서 있단다”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가 서로를 겨눈 총을 내려놓으면 누구나 아파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최철호 밝은누리 대표는 “전쟁을 일으키는 권력·탐욕가들은 늘 증오심을 불러일으켜 사람들을 그 속으로 몰아넣어 서로 죽이게 부추기기 마련인데, 반레 시인을 비롯한 이들이 참혹한 참상을 겪고서도 그 작동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웠다”고 했다. 반레 시인은 “우리가 승리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강한 신뢰였다”고 말했다. 정인곤 공동체지도력훈련원 간사는 “가족과 마을 분들이 죽거나 다치는 걸 보고 여전히 그 슬픔을 안은 채 살아가면서도 슬픔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평화의 씨앗을 심는 이들을 보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토록 깊은 상흔 속에서도 어떻게 용서와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로선 공감이 쉽지 않은 그들의 모습에 대해 최철호 대표는 “우리는 여전히 제국주의가 만든 분단체제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미 천년에 걸친 중국 지배와 프랑스 백년 지배, 미국과 일본을 차례로 물리쳐 승리했다는 자부심과 정신적 우월감이 있는 듯하다”며 “무조건적인 증오심을 경계하며, 프랑스에 대해서도 ‘탐욕에 젖은 전쟁지도자들과 선량한 프랑스 백성들을 구분해야 한다’며 ‘우리를 돕는 프랑스 국민들이 있어 우리가 싸움을 이어갈 수 있다’고 베트남 국민을 설득한 호찌민 같은 지도자가 있었기에 평화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게 가능한 것 같다”고 평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참상의 와중에도 아기들에게 베트남의 얼과 역사가 담긴 자장가를 들려주며 ‘세상도 베트남의 역사도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는 희망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순례단이 부른 평화와 희망의 노래는 한국 아이들의 마음에도 씨앗이 되어 심어졌다. 심지연(덴마크대사관 직원)씨가 데려온 세살 딸은 매번 반복해 듣는 순례단 노래를 외워서 가끔씩 “엄마, ‘지치고 어두워진 얼 밝혀~’ 해줘” 하며 조르기도 했다. 열살, 네살 두 아이를 데려온 김하룡 변호사는 “아이들이 전쟁 당시 사진을 보며 ‘이 형 누구야’, ‘이 삼촌 누구야’ 묻곤 한다”며 “이 아이들의 몸에 각인된 평화의 열망이 새로운 한국을 여는 힘이 될 거라고 믿는다”고 했다.  
 
 
 그랬다. 이들이 ‘생명평화 고운울림’이란 순례단을 꾸려 2017년 세월호 합동분향소가 있던 안산과 제주 4·3학살 현장, 부산 유엔묘지, 광주 5·18항쟁 현장, 고성 통일전망대 등을 순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지난해 여름엔 고대사와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 간도·연해주를 누비며 기도한 것도 다음 세대가 열 세상은 지금까지의 증오의 싸움판과는 다른 평화의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시베리아 열차 안과 바이칼 호수에선 기도회에 구경하러 몰려든 관광객들이 이들의 노래를 듣는 순간 공명을 일으켜 함께 펑펑 울면서 치유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들의 순례는 그런 위로만이 아니라 치열한 배움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들은 ‘치유와 평화’란 망각으로써가 아니라 깨어 있음으로 열린다는 것을 알기에 가서, 보고, 기록하고, 기억했다. 심지연씨는 “지금 사는 인수동 마을 뒷산에 조병옥 박사의 묘가 있어서 그곳에서 만날 약속을 하곤 했는데, 제주4·3 현장을 돌아보며 그가 바로 학살의 주요 책임자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놀랐다”고 했다. 허정은 생동중학교 음악교사는 “4·3 제주에서 빨갱이 잡는다고 무차별 살해한 이들이 베트남에 투입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죽이고, 베트남 참전자가 다시 5·18 광주에 투입돼 시민들을 죽였듯이 폭력과 살육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며 “명확하게 기록하고 반성하고 일상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관성대로 힘의 논리대로 폭력의 역사가 되풀이되고 마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순례단은 4월10~14일엔 일본을 찾아 일제 한인 징용 피해 현장과 재일조선인들의 우리학교, 해방 뒤 귀국하던 중 폭침된 우키시마호 현장을 찾아 아픔을 위로하고 보듬으며 기도하고, 애즈원과 야마기시 공동체를 순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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