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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마음산책

산티아고 길에서 삶의 미로를 풀다

등록 2015-06-24 08:58

산티아고의 단순한 걷기에서 삶의 미로를 벗어나다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길을 찾기 위해 세계의 순례객들이 모여드는 스페인의 산티아고에서 네덜란드 부부가 걷고 있다.

순례만큼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도 없다. 특히 좋은 숙소에서 머물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여행이 아니라 외롭게 걷는 순례가 그렇다. 구부정한 자세로 책상에 앉아만 있던 현대인에게 허리를 곧추세운 직립자세로 걷는 행위 자체가 삶의 재활훈련이다. 어떤 재활이건 시련이 수반된다. 다리는 아프고, 몸에 땀이 배고, 발엔 물집이 잡힌다. 온갖 사념에 사로잡히고, 몸은 파김치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한 고비, 두 고비를 넘기며 그 단순한 걷기에 집중하다 보면, 사념은 몸의 고단함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러면 오랫동안 공부와 일과 번민으로 부팅을 멈추지 않은 머리에도 선선한 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땅바닥에 발이 마찰되면서 머리를 스트레스로 달궜던 열이 아래로 내려가고, 선선한 기운이 머리로 올라간다. 동양 고전에서 우리 몸에 가장 좋다는 ‘수승화강’(水昇火降·물기운이 올라가고, 불기운이 내려감)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피가 순환되면서 머리는 차고 손발은 따뜻해지는 ‘두한족열’(頭寒足熱)로 몸이 살아나는 신호를 보낸다. 

그것만이 아니다. 번뇌가 가라앉으며 명징해진 머리에 그동안 실타래처럼 엉켜 보이지 않았던 인생의 방향이 보인다. 또한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머리와 가슴에 멍울처럼 뭉쳐 있던 증오도 발바닥으로 내려가 자연 속으로 스며들고, 가슴엔 넉넉한 자연의 아량이 배어든다. 그래서 걷기 순례야말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수행이자 명상이고 치유의 방법이다.

지난 9일 스페인 서북부 끝 산티아고를 찾았다.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순례자>를 쓰게 한 길이고, 25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걸은 서명숙에게 제주 올레길을 만들게 한 그 길이다. 

길도 시대에 따라 다른 목적을 갖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12사도 중 한명인 산티아고(히브리명 야고보)의 무덤이 9세기에 이곳에서 발견되면서, 이 길이 가톨릭 순례지로 떠올랐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도 과격하고 야심이 있는 제자여서 ‘천둥의 아들’로 불렸던 산티아고의 무덤과 순례길은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슬림들과 싸워온 스페인에 전의를 다지는 장소가 됐다. 산티아고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에 세계의 여행객들이 밀려들면서 산티아고도 가톨릭만의 순례길이 아니라 좀더 보편적인 세계인의 순례길로 변하고 있다.

산티아고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대성당의 돈 세군도 페레스 신부는 “종교적으로 좀더 높은 차원의 뭔가를 얻기 위한 사람들뿐 아니라 개인적인 고민을 해결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나는 누구인가’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오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산티아고는 이렇게 인생의 길을 찾는 이들이 고독하게 자신을 직면하는 수행처가 됐다. 이 순례길은 프랑스 남부의 국경마을인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이어지는 800㎞에 이어져 있다. 이 길은 도보로는 한달 정도, 자전거로는 1주일가량이 걸린다. 그러나 시간이 되는 만큼 3박4일이나 1주일, 혹은 2주일 정도 걷는 이들도 많다. 산티아고는 순례자 전용숙소인 ‘알베르게’ 숙박비 5~6유로를 포함해 하루 30유로(4만원 안팎) 정도의 부담 되지 않는 비용으로 순례할 수 있다.

*가톨릭 성지순례길에서 삶의 의미 찾는 세계인들의 순례길이 된 스페인 산티아고 800㎞. 몸은 지치고 발에 물집이 잡히지만, 걷고 또 걷는 단순한 반복 속에서 번뇌가 가라앉으며 삶의 길이 뚜렷하게 드러나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삶의 길을 찾으러 걷는 그 길을 잠시나마 걸어볼 수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종착지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주교좌성당이 멀지 않은 순례를 4~5㎞ 따라가보니, 제주 올레길처럼 황홀한 바다도, 지리산 둘레길의 산과 계곡의 멋진 풍광도 아니다. 대부분이 호젓한 시골길이다. 그래서 더욱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길이다. 고향집 뒷동산 같은 그 길로 사라져가는 이들의 뒷모습이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탕자의 귀로만 같다. 야산과 밭 옆길을 걸은 지 30여분이 지나자 찻길이 나온다. 찻길을 10여분 걸으니 다시 조용한 마을 속 골목길로 이어진다. 시골집엔 이곳 토종닭 수십마리가 뛰어논다. 마을에서 큰 배낭을 멘 청년이 온다. 아일랜드에서 왔단다. 이 길을 3주째 걷는 중이란다. 이걸 묻는 것만으로 묵상의 길을 방해한 것만 같다. 그의 얼굴에서 오직 자신의 내면과 직면하고자 하는 결전의 자세가 엿보인다. 숲길 끝에 은둔의 성소 같은 조그만 성당이 있다. 그 곁에 네덜란드에서 온 마크 부부가 둘 다 큰 배낭을 메고 걷는다. 넉넉한 자연미가 그의 몸을 타고 흐른다. 길은 늘 두갈래, 세갈래로 나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임을 알려주는 조개껍질과 손가락 방향이 그려진 표지석이 있어 안내해준다.

순례자들은 통상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있는 산티아고 무덤의 산티아고 동상을 껴안으며 기도하는 것으로 순례를 마친다.

길가에 커피와 맥주를 파는 객줏집 같은 가게가 있다. 그러나 손님들은 마을사람들뿐이다. 순례객들은 통상 새벽 5시에 눈을 떠 6~7시부터 걷기 시작해 알베르게가 문을 여는 시간인 오후 1시를 전후해 하루 20~30여㎞의 순례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순례시간 중엔 한가하게 술이나 커피를 마시고 있을 틈이 없다. 알베르게는 수용시설이 넉넉하긴 하지만 선착순으로 마감을 하기 때문에 지체할 수는 없다. 순례객들은 알베르게에 도착해 끼니를 해결하고, 빨래를 해 널고는 담소를 나누거나 쉬면서 내일의 순례를 준비한다.

산티아고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들어서고 있는 순례자들.

산티아고엔 한국인들이 적지 않다. 산티아고엔 연간 20여만명이 순례하는데, 이 가운데 한국인이 1만2천여명으로 가장 많다고 한다. 마산에서 왔다는 황아무개(60)씨는 다 키운 딸이 세상을 떠나는 비통함을 겪었다. 그는 “그동안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지냈는데 순례를 하면서 꽁꽁 감춰진 아픔을 드러내면서 치유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동행한 최아무개(60)씨는 “순례길에서 뭔가 영감을 주는 쪽지를 뽑았는데, 그곳에 ‘삶이란 각자 살아내야 할 신비이지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미술 개인교사를 하는 이윤정(31)씨는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어서 2주간 휴가를 내고 왔는데, 일어나 간단히 먹고 걷고, 돌아와 먹고 빨래하고 쉬고 자고 이 단순한 일정의 반복을 통해 번잡에서 벗어난 단순함 속에서 행복을 얻게 됐다”며 “이곳에서 서로 물집을 짜는 바늘과 실도 주고, 친절하고 진심 어린 순례객들을 통해서도 큰 위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순례객들은 단순한 걷기에서 삶의 미로를 벗어났다.

산티아고(스페인)/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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