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카이스트대에서 차려졌던 분향소
5일은 ‘자살 예방의 날’. 보건복지부는 이날을 맞아 우리나라의 인구 10만명당 자살사망자(2009년 기준)가 28.4명으로 OECD 국가 중 1위라고 발표했다. 하루 평균 42.2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자살 사망자는 10년새 5배가 증가했다. 10대부터 30대까지는 자살로 사망한 수가 교통사고와 암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40대와 50대에서도 암에 이어 자살이 2위다.
우리사회는 카이스트 대학에서 일어난 4명의 자살과 엄친아의 자살로 인해 한 때 ‘자살’을 이슈화했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미친듯이 경쟁을 부채질하는 ‘정상적인 삶’으로 돌와왔다. 등록금에 대한 대학생들의 아우성으로 뭔가 될성 싶게 떠들어대던 반값등록금 이슈도 잠잠해지고, 경기도에 이어 뭔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됐던 서울의 교육환경 변화도 갑작스런 곽노현 교육감 수사로 인해 또 다시 ‘정상화의 길’로 회귀가 도모되고 있다.
그리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스크린 속에서 <세 얼간이>만이 죽고 싶은 청년들의 마음을 하소연하고 있다. 두 눈을 똑똑히 뜨고도,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말까 불안한 시대에 얼간이라니. 더구나 어떻게 들어간 인도 최고명문 임페리얼공대인데 눈에 불을 켜고 경쟁할 생각은 않고, 딴생각이라니!
한국의 카이스트와 비슷한 인도 임페리얼공대의 동창인 세 주인공은 명문대에 들어오긴 했지만, 획일적인 학교 교육의 부적응자들이다. 병들어 누워있는 아버지와 지참금이 없어 시집도 못가는 큰누나를 둬 대기업에 취업을 해야만 하지만 강요식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는 라주, 사진작가가 되는 꿈을 늘 꾸면서도 아버지가 정해준 공학도의 길을 져버리지못한 채 죽지못해 학교에 다니는 파르한, 천재 중의 천재이지만 암기식 교육을 거부하고 진정으로 마음이 원하고 끌리고 필요한 공부를 자발적으로 하도록 해야한다는 란초. 세얼갈이들이 다니는 임페리얼공대는 지난해 잇따른 자살로 사회적 논쟁을 야기했던 카이스트처럼 학생들을 자살로 내몬다.
영화 <세얼간이> 속 주인공인 인도 명문 임페리얼공대의 세 학생들
세명의 얼간이들은 ‘학생들은 무조건 자신의 암기식 교육 방식에 따라 취업에서 원하는 성과를 거둬야한다’는 철저한 신념 하에 칼을 휘두르는 ‘바이러스총장’의 이단자들이다. 세얼간이들에 대한 논총을 줄 사람이 바이러스 총장 뿐일까. 이미 거대한 신자유주의 경쟁시스템의 바이러스에 깊게 감염된 다른 대중들도 ‘수재들만 갈 수 있다는 임페리얼공대에 들어가놓고, 학교에서 하라는대로만 하면 고연봉의 삶이 보장될텐데 무엇이 부족해서 반발하느냐’고 세얼간이들을 비웃을 게 뻔하다.
하지만 그런 삶이 누구에 좋은 것인가. 자식을 출세시켰다는 부모, 높은 취업률을 달성해서 학교의 명예를 드높였다는 교수, 그리고 부러움의 시선을 던지는 세상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타자일 뿐이다. 결국 자신의 삶을 살아야하는 이는 자기 자신인 셈이다. 자기 자신이 행복한 길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인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와 애플의 스티브 잡스처럼 대학을 중퇴하고 지구촌 최대 갑부가 된 삶도 있지만, 안전핀을 빼서는 안된다는 강박증 환자인 부모와 교수들 앞에선 어떤 모험이나 고뇌와 쉼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학생들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않고 무조건 경쟁으로만 내모는 임페리얼공대에서 여러 학생들은 목메어 죽거나 창 밖으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탐욕을 달성하기 위한 약육강식의 경쟁으로 내모는 교육시스템에서 그나마 승리자에 속한 카이스트와 임페리얼공대생들이 이럴진대 다른 아이들의 심정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자살로 인해 시끄러울 때 <한겨레> 독자란인 ‘왜냐면’엔 고등학교 3학년인 한 학생의 하소연이 실렸다.
“카이스트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고3학생으로서 한 가지 쓸쓸한 생각이 듭니다. 왜 청소년들의 자살에는 관심을 가져주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얼마 전 이른바 ‘엄친아’로 불리는 학생이 분신자살을 했을 때도 세상은 잠시 놀랐다가 금세 가라앉았습니다. 지난해 200여명의 학생들이 꽃다운 생명을 스스로 포기했는데 세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저 학업에 부담을 느꼈다, 고민이 있었나 보다는 하는 식의 추측성 이야기만 나돌았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학생들을 사지로 내몹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무한경쟁 속에서 학생들은 쉴 틈이 없습니다. 힘들고 쉬고 싶어도 어른들에게 말하면 그때가 제일 행복한 거라는 훈계만 돌아옵니다. 주변의 수많은 엄친아들에 비하면 ‘나’는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너는 대학 못 가!’하는 비난이 들이닥칩니다.
아마 자살한 학생들의 대부분은 이런 성적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가치도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지금의 교육방식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스트레스를 거쳐 무려 80%가 대학을 가지만, 스카이와 카이스트를 못가서 낙오되고, 대학을 졸업해서도 상당수가 비정규직이나 알바로 88만원 세대가 되거나 실업자가 되어 아무런 희망이 없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세상. 스카이대와 카이스트를 간 소수조차 경쟁 때문에 죽고 싶은 사회. 발육상태와 영양상태가 수십년 전에 비해 월등하게 좋아졌음에도 좀 더 예뻐지고 잘생기지 못하면 취직도 못가고 시집장가도 못갈까봐 하나같이 성형을 꿈꾸는 사회.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전국민 우울의 시대에 더욱 우울한 것은 위 고3학생의 하소연처럼 ‘공부도 못하는 것은 하소연할 자유조차 없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지난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타인이 생각하는 결과에 맞춰 살아야한다는 도그마에 빠지지 말라”며 “다른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파묻혀, 여러분 내면의 소리를 잃지 말고 무엇보다도, 용기를 갖고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좇아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부모와 선생님의 핀잔이 무서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덩치 큰 아이들’은 극장의 어둠 속에 숨어 울었다.
<세얼간이>를 보는 도중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은 아예 목을 놓아 통곡을 한다. 경쟁에 이기도 싶어도 이기지 못하는 설움이 북바쳐오른 것일까, 살고 싶은데도 혼자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 없이 목을 죄는 ‘자살 권하는 사회’에 대한 원통함일까, 얼간이조차 못된 우리의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울고 있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