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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마음산책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등록 2011-08-24 17:01

  “우리 불교인들은 이웃 종교를 진정으로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 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조계종이 종단의 명운을 걸고 결성한 ‘자성과쇄신결사본부’의 화쟁위원회가 23일 서울 견지동 조계사 앞 템플스테이기념관에서 이렇게 참회하면서 ‘내 종교의 관점으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않고,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소중하게 여기겠다’는 내용의 ‘21세기 아쇼카선언’을 발표했다.   아쇼카왕은 기원전 2~3세기에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인물로 형제 100명과 500여명의 신하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뒤 통일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전쟁에서 죽인 수십만명의 피가 강물을 이루어 흐르는 것을 보고 참회해 불교에 귀의한 뒤 동물병원까지 만들 정도로 인간과 모든 생명을 위한 사회복지 정책을 제도로 정착시키고, 불교 이외 타종교의 신앙도 비방하지않고 존중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이번 선언문은 전서울대강사인 명법 스님과 박경준(동국대)·성태용(건국대)·조성택(고려대) 교수 등 불교계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모여 15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작성했다. 이 초안은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고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열린 내용을 담아냈다.    
     아쇼카선언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종교 편향’과 관련해 대립각을 세워온 기독교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존중하고 가르침을 경청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선언에 대해 도법 스님은 “불교가 이웃종교의 성물이나 상징을 때려부수는 것과 같은 행위는 거의 하지않았지만, 이웃종교에 대해 무지하고, 내 종교적 관념으로만 이웃종교를 폄하하고 재단하는 마음이 적지않았다”며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서 이웃종교에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은 불교적으로도 큰 수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내 사람들이 안락하게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겠다고 나선 것이 종교이고 그 중 하나가 불교”라면서 “그런데 현실은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 때문에 국민이 근심해야하고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깊이 반성했다.   세계에서 대표적인 다종교 사회로 꼽히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불교계가 ‘이웃 종교를 존중하겠다’고 나선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일제에 항거한 3·1운동 당시 각 종교계 대표가 손을 잡은 것은 것을 국가 사회를 위해 마음을 합친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급성장한 개신교 가운데 근본주의적이고 극우적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공공장소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식으로 기독교 이외의 타종교에 대한 비방성 선교를 하는가 하면 일부는 사찰을 방화하거나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행위를 저지르면서 종교간 갈등을 부채질 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정권 차원의 종교 편향에 대해 불교계는 심한 반감을 보여왔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전쟁과 분쟁의 절반 이상이 종교 갈등에서 비롯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다종교도 화해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지, 한 나라의 다종교는 필연적으로 분쟁을 야기할 수 밖에 없을 지 시험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과연 우리가 만들어야할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여야할까. 때마침 요즘 다종교 사회인 중동에서 빚어진 종교 갈등으로 인한 한 가족의 비극을 그린 예술영화 <그을린 사랑>이 개봉돼 많은 것을 성찰케 하고 있다.    
     <그을린 사랑>은 지난달 21일 개봉돼 한달여만에 5만 관객을 돌파해 예술영화로는 올해 가장 많은 관객을 붙들었다. 이영화는 세계 영화제의 상을 휩쓸고 심사위원들부터 극찬을 받아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긴 했다.    캐나다인 감독 드니 빌뇌브가 연출한 이 영화는 유대교의 이슬라엘과 이슬람의 중동, 기독교인들이 얽혀 죽고죽이는 살육이 끊이지않는 중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국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빌뇌브 감독은 “시리아와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사이에 낀 가상의 작은 국가를 배경으로 했다”고 밝혔다. 영화의 일부가 레바논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영화의 배경이 인도가 아닌 중동이지만 아쇼카왕 재세시와 같은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 여과없이 등장한다. 영화는 캐나다에서 자란 쌍둥이 남매인 잔느와 시몽이 어머니가 비서로 일했던 ‘공증인’ 앞에서 어머니의 유언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살았을 때도 어느 어머니와는 달리 넋이 반쯤은 나간 것만 같았던 어머니는 죽은 다음 유언마저도 유별나다. 자신의 주검을 관에 넣지 말고 나체로 묻어주고, 비석도 놓지 말고, 이름도 새기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주검도 땅을 보도록 엎드리게 해달란다. ‘약속을 어긴자는 하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어머니 니왈은 어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일까.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남매에게 어머니는 편지를 남겼다.    ‘잔느, 네게 봉투를 하나 주마. 너희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란다. 그를 찾아서 이 편지를 전하거라.’  ‘시몽, 네게 봉투를 하나 주마. 너희 형에게 보내는 편지란다. 그를 찾아서 이 편지를 전하거라.’  ‘그들에게 편지가 모두 전달되면 너희에게도 편지를 줄게.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지면 비석을 세우고 내 이름을 새겨도 된다. 햇빛 아래에.’   남매는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다레쉬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것과 소지품 사이에서 나온 젊은 시절의 작은 사진 한장이 전부였다. 소극적인 시몽을 두고 잔느는 홀로 중동으로 ‘어머니의 역사’를 찾아 떠난다.    
     어머니 나왈 마르완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나왈은 처녀 때 한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가 사랑에 빠진 청년은 기독교인들이 철천지 원수처럼 여기는 무슬림 난민이다. 나왈의 형제들은 그가 보는 앞에서 나왈의 ‘사랑’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나왈은 그 청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다. 나왈은 가문을 더럽힌 여자로 낙인 찍힌다. 그의 아이가 태어나도 키울 수가 없다. 나왈의 할머니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발뒤꿈치에 문신을 새긴 뒤 고아원으로 보낸다. 나왈은 “언젠가는 너를 꼭 찾을 거야. 우리 아가”하며 눈물로 아기와 작별을 고한다. 이것이 바로 나왈이 유언에 밝힌 ‘약속’이었다. 그런데 나왈은 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일까.    할머니는 마을에서 낙인 찍혀 더 이상 그 마을에서 살기 어렵게 된 나왈을 도시의 친척에게 보내 공부를 하게 한다. 나왈은 대학생이 된다. 그래서 외국 난민을 추방하려는 기독교 민족주의에 맞서 학생운동을 한다. 그 때 자기의 고향인 남부의 기독교인 마을이 피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아원에 있을 아기를 찾아 나왈은 길을 나선다.   그러나 나왈은 버스를 타고가다가 삶을 바꿀 사건과 맞닥뜨린다. 기독교민병대원들의 무슬림 학살을 목격한 나왈은  아이의 흔적도 찾지 못하고 분노에 치를 떤다.  기독교민족주의 지도자의 집 과외 교사로 들어가 지도자를 암살한 나왈은  감옥에 수감된다. 그곳에서 수없는 고문을 받는다. 그곳에 국내의 고문기술자로 지금은 목사가 되어있다는 ‘이근안’을 연상시키는 ‘아부 타렉’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나왈은 무려 15년 동안의 고문에도 불구하고 결코 굴복하지않는다. 그렇지만 계속된 성고문으로 인해 나왈은 임신하게 된다. 나왈에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옥에서의 고통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아부 타렉의 존재다.    
    어머니의 과거를 안 남매가 눈물을 터트리는 사이 관객들도 숨을 멎을 듯한 충격 앞에 내동댕이쳐져 할 말을 잊는다.    왜 어머니는 자신의 고통스런 과거를 남매에게 송두리채 알게 했을까. 빌뇌브 감독은 “진정한 성인으로 거듭나려면 침묵과 분노 뒤에 감취진 유년의 상처를 탐험하는 일이 필요하다”며 “쌍둥이 남매가 어른이 되려면 어머니의 침묵 속에 존재하는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결코 이해하기 어려웠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서도 그들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세세히 안다면 그들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결국 부모와도 화해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말이다.    “너희들의 탄생은 공포 그 자체였지만, 그 배경은 위대한 사랑이었다. 함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란다.”  어머니가 남매에게 남긴 이 마지막 글귀엔 종교의 도그마로 인한 분노와 폭력으로 처절한 고통을 당하고서도 그것을 분노로 재생시키기보다는 화해와 사랑으로 극복하려는 한 여인의 비장함이 담겨 있어서 또 한번 관객들의 숨을 멎게 한다.    그처럼 처참한 고통으로 삶이 갈기갈기 찢기고서도 분노를 분노로 잇지않고, 사랑과 자비로 부활시키는 여인. ‘종교’라는 이름으로 나왈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은 것은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찢겨진 그 가슴들을 다시 사랑으로 채워주려는 그 어머니 나왈. 그 여인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예수이고, 부처란 말인가.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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