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이태석 신부, 옥한음 목사…
비우고 버리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지난해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데 이어 올해엔 유난히도 많은 종교인이 세상을 떠났다. ‘신드롬’까지 낳은 법정 스님(1932~) 외에도 ‘한국판 슈바이처’로 아프리카에서 봉사한 류강하 신부(1939~)와 이태석 신부(1962~), ‘노동자들의 아버지’ 도요안 신부(1937~), 개신교 제자훈련의 선구자 옥한흠 목사(1938~)가 모두 올해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몸은 사라졌지만 그들은 우리 마음의 별이 되었다. 그들이 남긴 것은 길상사나 사랑의교회 같은 건물이나 <무소유> <울지마 톤즈> 같은 책이 아니라 온몸으로 보여준 삶이었다. 과연 그들의 무엇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것일까. 그들이 남긴 정신을 네가지로 정리했다.
자발적 가난이 진정한 부다
법정 스님은 장례식조차 없는 간소한 다비와 저서 절판 선언으로 큰 충격파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그런 단절만이 충격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열반한 이후 드러난 그의 삶의 실상이 더 진한 울림을 낳았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얼마든지 호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인세 수입의 대부분을 아무도 모르게 가난한 이들에게 보시했고, 자신은 순천 조계산 불일암이나 강원도 오지의 오두막에서 달빛과 별과 꽃과 다람쥐의 벗이 되어 안빈낙도(安貧樂道)했다. 도덕과 정의와 자비를 내팽개치고 욕망의 질주에만 박수를 보내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극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에서 그는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그는 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대저택을 보시받아 길상사를 세웠지만 정작 그 자신은 단 하룻밤도 그곳에서 잠을 자지 않았고, 호흡이 끊어진 뒤에야 하룻밤을 보냈다.
미국 뉴저지주 출신으로 얼마든지 최고 선진국에서 부유한 삶을 구가할 수 있었던 도요안 신부는 1960년대부터 밑바닥에서 신음하던 한국 노동자들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무려 노동자 800여쌍의 주례를 서주기도 했던 그는 노동자들과 함께 한 시절에 가장 행복했다며 천만불의 평화로운 미소를 남겼다.
인격화한 가르침이 최고의 성전
올해 강남 요지에 2천억원대의 거금을 들여 새성전 신축을 시작해 ‘메가 처치’(거대 교회) 논란을 일으켰던 사랑의교회를 일구었던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의 선구자였다. 제자훈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훈련이다. 옥 목사가 남긴 감동은 ‘대형교회’보다는 삶의 실천에서 기인했다. 대형교회 목사들의 상당수가 자식에게 담임목사직을 넘겨주는 교회세습을 하거나 지금도 자녀들의 권력·금력 다툼으로 말썽을 빚고 있는 가운데 그는 정년을 5년 앞두고 가족이나 친인척이 아닌 오정현 목사에게 담임직을 인계했다. 한국목회자협의회 대표였던 그는 “세상의 본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행한 우리의 죄악을 참회하고, 세상 권세와 결탁해 진리를 왜곡하고, 거룩함보다는 풍요로움을, 겸손함보다는 온갖 명예를, 섬김보다는 소유를 더 갈망한 죄악을 회개한다”는 참회록을 발표해 성찰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
최근 정진석 추기경의 4대강 찬성발언 논란 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현실 참여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올해 선종한 도요안·류강하·이태석 신부는 성당 안에서만 ‘신앙’하지 않았다. 그들은 권력에 의해 짓밟히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노동자와 농민, 아프리카 흑인들의 삶 속에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의사출신인 이태석 신부는 지난 20년 동안 200만명의 사망한 내전을 겪은 남수단 역사상 최초의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하느님의 사랑’과 ‘사랑의 위대함’을 지상에서 드러내고 갔다.
자비심은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다
‘개신교 장로’인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종교편향 논란과 종교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법정 스님이 열반한 뒤 전남 무안 초당대 문현철 교수가 전해준 하나의 일화는 ‘종교 포교’보다 위대한 자비심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고교 2학년 때부터 법정 스님과 인연을 맺은 문 교수는 가톨릭 영세를 받던 날 목숨을 잃을 뻔한 교통사고를 당하고 하느님에 대해 회의할 때 법정 스님은 “이런 아픔을 통해 더 성숙해져 더 큰 시련도 이겨내게 하려는 것”이라고 위로했고, 훗날 불교로 개종의사를 내비칠 때 “천주님의 사랑이나 부처님의 자비는 풀어보면 한보따리”라며 신앙을 그대로 지킬 것을 권유해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는 고백을 전해 주어 포교보다 위대한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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