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종교의 같음과 다름’ 콘퍼런스
법정 스님-김수환 추기경-강원용 목사
종교간 대화와 교류 큰 ‘발걸음’ 재조명
“먼저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의 뜻에 감사드립니다.”
3일 오후 4시 서울 신촌 연세대 백양관에서 이런 인사를 올릴 인물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법정 스님의 조카뻘인 현장 스님이다. 개신교 교수들의 모임인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회장·이정배 감신대 교수)가 여는 이날 콘퍼런스엔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등 각기 다른 종교의 세 인물이 등장한다. 콘퍼런스 주제가 ‘세 명의 거인들이 바라본 이웃종교의 같음과 다름’이다.
전남 순천 송광사 뒤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의 시자로 승려 생활을 시작한 현장 스님이 법정 스님을, 김수환 추기경의 종교 화합 뜻을 받들어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사무총장 등으로 활약한 변진흥 ‘가톨릭대 김수환추기경연구소 부소장’이 김 추기경을, 강원용 목사가 일군 경동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잇고 있는 박종화 목사가 강 목사를 각각 조명한다.
현장 스님이 ‘주님의 뜻에 감사’하는 것으로 발표를 시작하기로 한 것도 법정 스님이 기독교 쪽의 초청에 응할 때마다 했던 것을 본뜬 것이다. 미리 엿본 이들 세명의 원고를 토대로 세 거인의 삶과 철학을 재구성해본다.
불일암에 성모상 모셔두고 촛불공양
강원용 목사는 자기 종교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배우는 겸손의 자세를 강조했다. 생명과 평화를 위해 함께함을 중시했던 강 목사는 다종교인 한국 사회에서 ‘종교간 이해와 화해’의 시대를 연 선구자였다.
젊은 시절 강 목사와 함께 종교간 대화의 물꼬를 튼 이후 법정 스님은 1974년 불일암 은둔에 들어갔지만 그리스도인들과의 친분은 계속됐다. 법정 스님이 김 추기경뿐 아니라 이해인 수녀를 비롯한 많은 가톨릭 수도자들과 친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웃종교인을 불자에 비해 전혀 차별하지 않을 만큼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법정 스님은 상(相)에 얽매이지 않은 불교수행자답게 관세음보살과 성모 마리아의 차별을 넘어섰다. 이미 1970년대 초 서울 강남 봉은사 다래헌과 조계산 불일암에 머물 때 서가 한편에 성모상을 모셔두고 촛불 공양을 올리곤 했고, 길상사의 관음보살상을 가톨릭미술가협회 회장이던 최종태 서울대 교수에게 조각하도록 요청해 조성했다. 이 관음상은 이마 위에 보관을 쓰고 왼손에 감로보병을 든 전형적인 관음상이면서도 깊은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분위기를 물씬 풍겨 ‘마리아 관음상’이란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법정 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의 연등 수익금 10%를 서울가톨릭복지회에서 운영하는 ‘성가정 입양원’의 후원기금으로 기탁했다.
법정 스님의 다비식장에 나타난 한 가톨릭신자 교수의 고백은 법정 스님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문현철 초당대 교수는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잇기 어렵던 대학시절 법정스님으로부터 남모른 도움을 받았는데, 가톨릭 영세를 받던 날 큰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법정 스님에게 ‘하느님이 어떻게 영세받은 날 교통사고를 나게 할 수 있느냐’고 불평하며 개종의 뜻을 밝혔을 때 “천주님은 그런 만화 같은 일을 하는 분이 아니고, 이런 아픔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도록 힘을 주는 것”이라며 가톨릭 신앙을 지키도록 해주었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심산 묘소 참배하며 유교식으로 큰절
김수환 추기경은 1956~63년 독일 유학시절 이웃종교에 닫힌 창문을 활짝 열었던 교황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지켜보고 귀국해 가톨릭의 변화를 이끌었다. 김 추기경은 2000년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을 연구하는 심산사상연구회로부터 심산상을 받은 이후 심산의 묘소에 참배하면서 유교식으로 큰절을 올려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김 추기경은 “천주교 성직자이지만 한국인이기에 제 몸 안에도 어딘가 유교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유교나 천주교나 모두 ‘효의 종교’이지만, 그리스도교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큰효도를 바탕으로 부모께 대한 효를 하려는 하향적이고, 신본(神本)적이고 미래적인 성향인데 비해 유교는 부모에 대한 효를 통해 천(天)에 대한 큰효도로 올라가는 상향적이고 인본(人本)적이고 현재적 성향이 강해 상호 보완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심산상 수상 강연 말미에서 “유교의 인(仁)사상, 불교의 대자대비사상, 그리스도교의 사랑 정신이 함께 손을 잡고 대자연의 생명을 해치고 동족 분단의 아픔을 겪는 이 땅에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변화시켜 갈 때 한국 민족은 환태평양시대에 명실상부한 ‘동방의 빛’으로 인류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나이도 믿음도 달랐지만 마음 열고 친분
해방 공간에서부터 미래의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강원용 목사(1917~2006)는 1959년 크리스천아카데미를 창설하고, 1965년 종교간 대화를 주도한 인물로 1960~70년대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손을 잡고, 종교간 이해와 협력의 시대를 연 촉매였다.
김 추기경(1922~2009)은 강 목사보다 10살이 적지만, 불과 42살에 주교가 되고, 45살에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어 65년 종교지도자 모임에 참여해 강 목사와 함께했고, 15살이 적은 법정 스님(1932~2010)도 30대 초반부터 불교계에선 유일하게 당시 개신교인들이 주도한 민주화운동에 합류해 이들과 교류했다. 법정 스님은 강 목사의 크리스천 아카데미에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활동했다.
김 추기경과 법정 스님은 서로 종교가 다르고 나이 차이도 열살이나 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나 다름없었다. 김 추기경은 서울 혜화동에 있던 자기 방 입구에 법정 스님과 합장으로 인사를 나누는 대형 사진을 늘 놓아두고 있었다. 김 추기경은 1997년 겨울 서울 성북동 길상사 개원법회 때 법당을 찾아와 축사를 하면서 유머로 종교 간 벽과 거리를 허물어버렸고, ‘부처님 오신 날’엔 아무 연락도 없이 길상사 마당으로 찾아와 법정 스님과 나란히 앉아 연등 아래서 산사음악회를 즐기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에 대해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추천할 만큼 법정 스님의 팬이었다. 이런 김 추기경의 초대로 1998년엔 법정 스님이 명동성당 제대 앞에 서서 가톨릭 신자들을 상대로 설법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조현 기자
현장 스님-변진흥 부소장-박종화 목사가 ‘세 명의 거인들이 바라본 이웃종교의 같음과 다름’ 콘퍼런스에서 발표할 원고 전문.
◈ 법정스님이 바라본 이웃 종교의 같음과 다름
-현장 스님(티베트박물관장)
1. 종교 교류의 다섯가지 방법
먼저 이 자리에 불러주신 한국 기독자 교수협의회 회장이신 이정배 교수님과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의 뜻에 감사드리며 인사 올립니다. 이것은 법정스님께서 이런 자리에서 인사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발제 내용도 스님의 종교 교류의 행적을 찾아서 스님의 목소리를 직접 전하는 방식으로 발제를 준비했습니다.
법정스님의 행적을 돌아보고 인간관계와 사회 활동을 살피면서 스님의 다양한 역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큰 흐름에 따라 열(10)가지로 활동 영역을 분류해 보았습니다.
1. 선 수행자와 명상가로서의 법정.
2. 경전 번역가로서의 법정.
3. 문필가로서의 법정.
4. 민주화 운동가로서의 법정.
5. 불교 개혁가로서의 법정.
6. 자연 주의자이며 생태 철학가로서의 법정.
7. 무소유 전도사로서의 법정.
8. 아름다움을 추구한 미학가로서의 법정.
9. 차(tea) 문화를 사랑한 다인으로서의 법정.
10. 종교 교류 활동의 모범을 보여준 법정.
그중에서도 오늘은 종교 교류 모범활동가로서의 법정스님에 초점을 맞추어 행적을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양사회에서 종교교류에 앞장서시는 티벳불교의 법왕 달라이 라마께서는 한국의 여성 수도자 모임 삼소회원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자기 종교에는 신념을 가져야 되지만 이웃 종교에는 존중의 마음을 가져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종교 교류를 심화 시키는 다섯가지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첫째, 종교학자들 간의 학술세미나를 통한 교류와 만남.
둘째, 각 종교 수도자들과 영성체험을 나누는 만남.
셋째, 각 종교 지도자들의 교류와 만남.
넷째, 이웃종교의 성지를 순례하는 기회를 갖는 것.
다섯째, 사회적인 문제에 종교가 서로 힘과 지혜를 모아 협력하는 것.
법정스님께서는 달라이라마가 제안한 다섯가지 방법을 너무도 완벽하게 실천하여 종교교류의 큰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불일암 시자 시절 기억을 되살려 보면 스님께서는 불자들 보다 천주교나 기독교인들에게 훨씬 마음으로 배려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스님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불일암을 찾아왔지만 그중에서도 천주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을 스님께서는 천주 보살이라 부르셨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스스로를 천불교 신자로 부르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스님께서는 뜻하지 않게 천불교 교주가 되신 셈이랍니다.
또 하나의 예로서 유럽 여행중에는 장익주교님의 도움으로 베네딕도 성인의 수행처인 수비아코를 참배하며 묵상에 잠기시고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을 <맑고 향기롭게> 소식지에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스님이 존경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이 계셨던 아씨시를 둘러보면서 마치 인도의 불교성지를 참배할 때처럼 아주 크나큰 성스러움과 성인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왔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2. 종교를 바꿀 생각은 하지 마라
법정스님의 다비식을 앞두고 강원도 오두막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18년 이상을 머무셨던 암자 주변에는 스님이 손수 심어놓은 자작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신성한 빛을 내뿜으며 스님의 고결한 영혼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보통나무들은 꽃과 잎, 열매 등의 모양을 따서 꽃말과 이름을 짓지만 자작나무는 기름기 머금은 흰 나무껍질이 자작자작 불에 타는 소리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화중생련(火中生蓮), 관도 수의도 없이 평소 입던 승복위에 가사만 한 장 덮은 스님의 육신을 태우는 불길이 연꽃으로 변하면서 자작자작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작은 불씨들이 검은 하늘로 솟아오르며 사람들 가슴속에 한 점 불씨로 타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불씨는 청정과 청빈의 불씨이며 친절과 자비의 불씨였습니다. 이제 그 불씨를 키우는 일은 살아 남은 저희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비식날 불일암에 올랐습니다. 저는 스님께서 불일암을 짓기 시작할 때 출가하여 불일암 낙성식(1975년 9월 2일)때 수계하여 불일암과 출가 나이가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더욱 불일암을 찾았습니다. 그 때에 마당에는 한손에 묵주를 돌리며 기도하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목포 초당대 교수 문현철 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분이 간직한 자기만의 법정스님 이야기를 듣고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법정스님의 진면목과 종교의 틀을 넘어선 넓은 뜰을 보는 듯 했습니다.
그는 방황한 10대에 어느날 담임의 권유로 법정스님의 작품<산방한담>을 읽고 문교수는 불일암을 찾아가 당돌한 그의 질문으로 법정스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뒷바라지로 조선대 법대 1학년 1학기를 마친 뒤 등록금을 마련 못해 학업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스님께서 등록금 고지서를 광주 베토벤 음악 감상실에 맡겨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빠짐없이 등록금을 부쳐주었답니다. 어려운 친구 있으면 소개하라 해서 가난한 친구 세 명을 소개해서 그들도 졸업 때 까지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대학교수가 되고 병원 의사를 하고 있지만 스님을 직접 뵌 적은 없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도움 받은 사실을 일절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해서 지금까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는데 스님 다비식을 모신 후에야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대학 다닐 때 가톨릭 입문을 준비하던 그는 다니던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교통사고를 당해 2주일간 사경을 헤매고 5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습니다. 퇴원하자마자 송광사 불일암을 찾았습니다. 법정스님은 홀쭉해진 몸을 보고 “어디 아팠어?”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를 치인 차를 붙잡아 주지 않고 영세 받은 날 교통사고를 나게 할 수 있느냐? 나도 스님처럼 불교를 믿고 싶다.” 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천주님은 그런 만화 같은 일을 하는 분이 아니다. 이런 아픔을 통해 네가 더욱 성숙해져 더 큰 시련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주님의 사랑이나 부처님의 자비나 모두 한 보따리 안에 있는 것이니까 따로 종교를 바꿀 생각은 하지 말라”고 당부말씀을 하였다고 합니다.
저를 만난 그날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아뵙는 심정으로 불일암 마루 앞에서 “스님! 스님 계세요? 저 왔습니다. 현철입니다!” 하면서 목이 메었습니다.
3. 종교 교류 활동의 대표적인 사례들
스님의 대표적인 종교교류 활동을 행적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970년 초반 강원룡 목사님이 중심이 된 크리스챤 아카데미 종교간 대화모임과 6개 종교지도자모임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활동하셨습니다. 또한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회복 국민선언 각계인사 71명에 유일한 불교인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때 불교 종단에서는 몰지각한 승려로 비난을 받고 정보부 형사들의 감시와 편지까지 사전 검열을 받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 생활이 불일암까지 이어졌습니다. 함석헌 선생과 장준하 선생, 계훈제 선생 등 민주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사회의식에 눈뜨고 종교인의 시대적인 소명에 눈 뜬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때의 인연들이 씨앗이 되어 종교교류의 폭이 심화되고 동지적인 우정을 나누게 됩니다.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셨고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운영위원으로 종교간 대화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85년 6월 26일 조선일보 21세기 모임에서는 서광선 목사님과 법정스님의 특별대담 “다종교사회, 한국 종교의 길” 이란 주제로 심도 있는 대화를 소개하였습니다.
1997년 5월2일 평화신문 부처님 오신날 기념으로 마련된 장익주교님과의 인터뷰에서 스님의 말씀을 옮겨 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만난다는 것을 시절인연으로 풀이합니다. 시절인연이 오면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난다는 거지요. 친구간의 만남이라는 것도 종교적인 빛깔이나 의식을 넘어서 마음과 마음이 접촉될 때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주교님을 만날 때는 내가 중이라거나 상대방이 사제라는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허심탄회 하게 만나다 보니 어떠한 벽도 없습니다. 만나서도 종교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종교 간의 벽이 허물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대화가 있어야 되고 대화가 있기 위해서는 독단적인 울타리를 넘어서 모든 종교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윤리인 공동선을 가지면 용해가 됩니다.”
1997년 5월에 기독교 사상에서는 부처님 오신날을 축하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그 내용은 김경재 목사님이 법정스님께 보내는 편지형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때의 내용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석굴암의 미소는 만물의 인연생기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깨달은 이의 법열과 자비심의 미소요, 십자가의 절규는 민중과 만인의 고난을 온몸으로 참여한 사랑하는 이의 사랑의 고통이었습니다. 전자는 빛이 파동으로 움직이는 모습이요, 후자는 빛이 입자로 돌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빛은 파동이면서도 입자이듯이 불교와 기독교는 우주적 종교의 가장 전형적인 두가지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최근 자연 환경의 훼손이 극에 달하고 남북분단의 현실속에서 사회윤리의식과 도덕성이 황폐될대로 된듯한 이 민족사의 위기에 모든 종교인들 특히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마음과 뜻을 합하여 생명을 살리고 인간성을 지키는 일에 더욱 협동하고 뜻을 합해야 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불교는 기독교에서 종교의 사회활동방식을 배우고 기독교는 불교에서 한국의 문화전통과 명상전통을 배우면서 자신의 영역을 풍성하게 하고 심화시켜 가야 한다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날의 스님께서는 우리사회의 불의를 꾸짖고 불교의 타락과 세속화를 질타하셨습니다. 오히려 종교는 다르더라도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오히려 가족이나 도반처럼 아끼고 정을 나누었습니다. 사회적인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청정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를 들면 식사자리에서 “스님! 약으로 고기 좀 드십시오, 그리고 술 한 잔만 올리겠습니다.” 하면 “내가 먹을 수는 있지만 이제까지 지켜온 지조를 지키려고 하니 여러분이 도와주세요. 그리고 나는 전생에 많이 먹었으니까 여러분들 많이 드세요.” 하고 사양하시는 분이였음을 말씀드립니다.
법정스님께서는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는 물건 이 세(3) 가지를 모두 잊어버려야 참된 배품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웃종교와의 벽을 허물고 종교교류를 통한 여러 활동이 결국은 자기 종교를 제대로 알리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불교를 제대로 알려면 불교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수행자는 수행자라는 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가장 싫어하신 호칭이 큰 스님이란 말이었으며 그 흔한 호 하나 갖지 않고 <비 구 법 정>이란 단, 네(4) 개의 글자로 떠나가셨습니다.
4. 길상사의 마리아 관음이 보여주는 커다란 어울림
스님께서는 단순한 삶을 추구하시고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반찬은 세(3) 가지가 넘지 않게 하셨고, 광목옷을 손수 빨아서 풀 먹여 입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손수 장작을 쪼개고 군불을 지피며 채마밭을 가꾸고는 연장을 씻어서 제자리에 잘 정돈해 두었습니다. 다기 한 벌, 책 몇 권, 밭 한 떼기로 큰 재산을 삼으셨던 스님께서는 뜻밖의 인연으로 대원각을 기부 받아 길상사를 개원하게 되었습니다.
개원식에는 김수환 추기경과 원불교 박청수 교무 등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분들이 축하의 마음을 보내왔습니다. 그때 스님께서는 이렇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는 스님께서 개원법회에서 다짐하신 대로 불자들만을 위한 절이 아니라 종파를 초월하여 누구나 산책하며 마음을 쉬고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 개방되었습니다. 산책 로를 만들어 들꽃을 심고 무소유의 철학을 담은 명구들을 나무에 새겨 달고 “침묵의 집”을 만들어 자신을 돌아보는 작은 선방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길상사의 가장 큰 명물은 일주문을 들어서서 바라보이는 설법전 아래 모셔진 마리아 관음이 아닐까 합니다. 길상사의 관음보살상은 가톨릭 미술가 협회 회장이신 최종태 교수를 어머니로 법정스님을 아버지로 하여 2000년 4월 20일 이 세상에 태어난 특별한 보살입니다. 마리아 관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인연담을 소개 합니다.
가톨릭 미술가 협회 회장으로써 성당의 성모상을 많이 조성한 최 종태 교수는 조각의 완성이 관음상이라 여기고 마음속으로만 그림을 그려 두었습니다.
그때 마침 법정스님이 설립한 시민단체 “맑고 향기롭게”의 이사이며 가톨릭 신자인 정채봉 작가에게 자신의 소망을 전하였습니다. 최종태 교수를 만난 법정스님은 단번에 의기투합하여 무애 자재한 미륵반가사유상의 느낌을 살려 관세음 보살상을 만들어 보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최종태 교수는 법정스님의 뜻을 받들어 단, 하룻만에 관음상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높이 1.8M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관음상은 이마위에 오불보관을 쓰고 왼손에는 질병의 고통을 없애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감로보병을 들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가슴위로 높이 들어 올려 모든 두려움을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얻으라는 의미의 시무외인의 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깊은 슬픔에 잠긴 성모마리아상을 연상케 하며 알듯 말듯한 은근한 미소는 사랑의 어머니를 표현한 느낌입니다.
최종태 회장이 조성한 길상사의 관음상은 전통 불교조각의 명상미에 가톨릭분위기를 가미하여 종교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최교수는 고마운 인연을 기려 모든 작업을 무료로 해 주었습니다. 처음 보는 불자들은 생소한 느낌을 받지만 예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지가 될 만큼 종교 화합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완성된 관음상을 보신 법정스님은 “그저 예쁘기만 해서 좋은 불상은 아니다. 불상은 그 시대 작가의 눈으로 재조명되고 창작 되어야 하는데 그동안 불교계는 너무 융통성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최회장이 고통과 기쁨이라는 양면을 지닌 자비의 화신 관음상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잘 표현해 주어 고마울 따름이다. 또 이를 성모님의 이미지와 조화시킨 것이 돋보인다.” 고 극찬하였습니다.
길상사에는 가톨릭 신자들과 수녀님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마리아상을 닮은 관음상 앞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성모송을 바치며 기도를 올립니다. 또 불자들은 공양미와 양초를 올리고 “관세음보살” 기도를 올립니다. 기도를 듣는 길상사 관음상은 정체성을 잃고 혼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관음상의 작은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말 한마디 “나는 누구인가” 그 뒤로 붙은 이름이 “마리아 관음”입니다. 불교와 천주교가 한 몸이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난 마리아 관음은 천불교 신자뿐 아니라 미래세대의 우리 후손들에게도 커다란 어울림을 줄 것입니다.
5. 법정스님 명동성당 강론
1998년 2월 24일 서울 명동성당 제대 앞에는 가톨릭 사제가 아닌 승복을 입은 법정스님이 서 있는 진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법정스님의 명동성당 강연은 1997년 12월 14일 김수환 추기경이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한 답례의 성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법정스님은 평화신문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기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 메시지를 띄운데 이어 명동성당의 요청을 받고 <경제위기극복과 청빈의 삶>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였습니다. 이날, 법정스님은 강론에 앞서 명동성당에서 강론을 하게 된 인연에 감사하며 명동성당 축복 1백 주년을 맞는 올해 이 자리에서 강연을 하게 해 주신 천주님의 뜻에 거듭 감사한다고 말해 신자들로부터 힘찬 박수를 받았습니다.
법정스님은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는 소음과 다름없다”고 하였습니다. 누에가 거친 뽕잎을 먹고 비단실을 뽑아내듯이 스님께서는 대장경이라는 큰 숲에서 청정한 잎들을 모아 유려한 우리말과 감성적인 언어로 불교를 설법해 주었습니다.
스님의 그런 설법정신은 이웃 종교를 향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 종교의 언어와 정서로 대화하고 글을 쓰시는 특별한 달란트를 갖고 계셨습니다. 가톨릭에 대해서 쓴 스님의 글을 본 어떤 신자는 법정스님은 승복만 입었지 마음속에는 천주님을 모시고 사는 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법정스님은 봉은사 다래헌과 불일암에 계실 때 서가 한편에 성모상을 모시고 촛불 공양을 올리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통하여 많은 친교를 나누었던 해인수녀님은 가르멜 수녀원에서의 법정스님 강연내용을 회상하면서 눈감고 들으면 그대로 가톨릭 수사님의 말씀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다음은 법정스님이 이해인 수녀님에게 보낸 편지 답신 내용 중 일부입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재난들로 속상해 하던 수녀님의 그늘진 속뜰이 떠오릅니다. 사람의, 더구나 수도자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한다면 자기도취에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 신의 조영 안에서 볼 때 모든 일은 사람을 보다 알차게 형성시켜 주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런 뜻을 귓등으로 흘리고 말아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수녀님, 예수님이 당한 수난에 비한다면 오늘 우리들이 겪는 일은 조그만 모래알에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 성인들은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요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기일전 하여 날이면 날마다 새날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위의 편지글을 보게 되면 누가 불교에 몸담고 있는 스님의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임 신부가 신자의 상담에 답해주는 글이라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떡일 내용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성북동 길상사가 개원 하던 날 길상사 법당을 찾아와 기쁜 마음으로 축사를 해주시고 농담과 유머로써 종교 간의 벽과 개인 간의 거리를 금방 허물어 버린 분이라고 스님은 추억하고 있습니다. 또 부처님 오신날에는 아무 연락도 없이 길상사 마당으로 들어오셔서 법정 스님과 함께 나란히 앉아 연등 아래에서 산사 음악회를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이제는 다시보기 어려운 위대한 어른들의 천진한 만남이 종교 교류의 큰 모범으로 남아 있습니다. 길상사 측에서는초파일 연등 수익금의 10%를 서울 가톨릭 사회 복지회 에서 운영하는 “성가정 입양원” 의 후원 기금으로 기탁하였습니다.
다음은 김수환 추기경을 떠나보내며 법정 스님이 쓰신 추도문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의 내용입니다.
“사람은 결코 태어나면서부터 단순한 것이 아니다. 자기라는 미로 속에서 긴 여로를 지나온 후에야 단순한 빛 속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고 하느님은 단순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하느님께 가까워지면 질수록 신앙과 희망과 사랑에 있어서 더욱 더 단순하게 되어간다. 그래서 완전히 단순하게 되어갈 때 사람은 하느님과 일치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안의 벽과 우리 밖의 벽, 그 벽을 그토록 허물고 싶어 하던 당신, 다시 태어난다면 추기경이 아닌 평신도가 되고 싶다던 당신,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이 땅엔 아직도 싸움과 폭력, 미움이 가득 차 있건만 봄이 오는 이 대지에 속삭이는 당신의 귓속말,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 하라.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리고 용서하라.”
스님의 소망을 묻는 최인호 작가에게 스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게 꿈이 있지요.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남은 삶을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고 싶군요. 그리고 추하지 않게 그 삶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단순하고 절제된 삶이 출가수행자의 삶이요, 단순한 존재인 신께 나아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 맺는 말
강원용 목사님과 김수환 추기경, 그리고 법정 스님은 우리 시대 세 종교를 대표하는 큰 어른들이었습니다. 강원룡 목사님이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종교간 대화 모임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인연으로 종교간 만남과 교류가 심화되고 종교간 벽을 허물고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큰 뜻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중국 남북조 시대에 호계삼소 (虎溪三笑)로 유명한 역사인물들이 있습니다. 도교의 육수정, 유교의 도연명, 불교의 혜원 법사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함께 어울리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호계삼소 (虎溪三笑)의 고사가 만들어진 것은 그 당시 벌써 유,불,선 삼교간의 비난과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때 민중의 염원은 세 종교가 화합해서 민중의 고통을 구제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요?
큰 가마솥을 받쳐주는 세 발처럼, 발이 셋 달린 까마귀가 썩은 고기를 먹어 치우듯 세상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참된 종교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역사적으로도 이루지 못한 세 종교의 화합을 이루어 낸 세 분의 어른 앞에 다시 큰 절을 올립니다.
법정스님이 바라본 이웃 종교의 같음과 다름이란 주제를 놓고 스님의 행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스님은 우선 불교라는 틀에 매이는 걸 거부하셨고 수행자라는 상에 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출가 수행자의 본분에서 벗어나지 않고 항상 처음 시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웃 종교를 대할 때도 다른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인 코드가 맞으면 깊은 우정과 가족적인 정을 나누셨습니다.
또한 자신의 말과 글과 일치하는 삶을 살았고 체험하지 않고 깨닫지 않은 사실은 글로 쓰지 않았습니다. 법정 스님이 남긴 글과 삶과 죽음의 모습, 종교 교류의 흔적들이 가신 후 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사람이 법정 스님이 바라본 이웃 종교의 같음과 다름을 주제로 발제하게 된 것을 대단히 송구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법정 스님이 이해인 수녀에게 써준 게송 한 구절을 음미하면서 오늘 발제를 마칩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여해 강원용이 바라본 이웃 종교의 같음과 다름
-박종화(경동교회 담임목사)
Ⅰ. 들어가며
여해 강원용 목사는 한국땅에서 시작된 “종교간의 대화”로 출범시킨 선두주자이다. 1965년 10월 18일-19일 용당산 호텔에서 모인 6대 종단 지도자들의 “창립을 위한 대화”가 그 효시이다. 6대 종단을 “가톨릭, 기독교, 불교, 천도교, 유교, 원불교”로 한정했다.
여해는 참여종단의 “자격과 카테고리”의 기준을 철저히 “인간화에의 공헌”으로 보았다고 했다. 말하자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인간됨에 공헌하는지 아니면 역행하는지를 보고 나아가 인간화의 사회적 순기능 곧 “평화의 실현, 전쟁방지, 핵무기 폐기, 군사력 감축, 생태계 보호” 등의 문제에 종교가 순기능적으로 실천하는가의 여부를 기준삼았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여해는 이후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의 회장을 비롯해 「아시아 종교인 평화회의」의 회장으로, 「세계 종교인 평화회의」지도자로 활동한 바 있다. 종교 간의 대화를 시작하면서 여해는 처음부터 “선”과 “폭”을 분명히 하면서 “이웃일 수 있고” “이웃이어야 하는” 종교 간의 만남을 시작한 사람이다.
종교인 평화회의 말고도 “하나의 교량 건설적 단체이지 하나의 종교는 아니다”라고 천명하는 「종교연합」의 한국위원회 설립에도 공헌했고 지도적 책임도 맡아 냈었다.
여해의 이웃 종교관을 담론의 형식을 빌려 설명할 수 있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여해 스스로 몸으로 체화한 이웃종교대화운동이기에 담론을 넘어선 삶으로의 실천을 눈여겨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여해의 이웃종교관에 관한 담론은 본인이 직접 고백한 바를 인용하는 것으로 구성하려고 한다. 많지 않은 담론이지만 이웃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을 실천한 사람으로서 표출하는 담론은 그만큼 절제된 진정성을 깊고 넓게 담고 있다는 생각이다.
Ⅱ. 다름 속의 같음
여해는 종교 간의 “다름”을 분명히 인정한다. 다른 종교들이 대화와 협력을 위해서는 “같음”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역설적인 의미의 같음이다. 곧 대화의 주체인 각 종교가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지녀야만 대화가 생산적으로 가능해지고, 대화를 통한 협력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종교 간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확실한 정체성이다. 정체성이 없다면 대화란 필요하지 않다. 다 합해 버리면 그만이다. 오늘은 불당에 가서 법회를 하고, 내일은 교회에 가고, 모레는 다른 데에 가면 되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대화가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정체성을 명백하게 해야 한다. 어물어물한 태도를 지녀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임을 명백하게 하면 할수록 더 개방적이 된다. 정체성이 확실하면 할수록 연대의 폭이 넓어진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 몇 년 전 감리교 신학대의 변선환 교수의 문제가 있었을 때, 어떤 신문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도 구원을 얻는가?’ 라는 질문을 했다. 그때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해당되면 구원을 얻고 해당되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다면 이 사실은 분명히 해야 한다.
두 번째로 종교 간의 관계에 있어서 취할 수 있는 입장이다. 정체성(identity)이 성실하고 진지할수록 다른 종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아가 서로 간에 배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겸손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을 종교 간의 대화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인 “관용”이라 이름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용은 섞음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확인이요 다른 종교의 정체성을 인정함을 종합하여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여해의 고백적 입장을 들어보자: “다른 종교와 어떻게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우선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많이 배워야 한다. 많이 배움으로써 신앙의 성숙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다른 종교인들의 신앙을 배운다고 우리 신앙이 없어진다면, 그 정도의 신앙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자기 신앙이 있다면 그 신앙의 그릇에 다른 사람의 신앙을 담아내야 한다.
한 예를 들어 보겠다. 지금 세종 문화 회관 자리에 있던 시민 회관에서 전국 불교 대회가 있었다. 당시 이청담 스님이 전 불교의 종정이었다. 전국의 스님들과 신도 대표들이 시민 회관에 가득 차게 모였는데, 이청담 스님이 나를 불러 거기에서 강연을 하게 했다. 만일 내가 기독교인들이 모두 모인 데서 이청담 스님을 불러서 강연을 하게 되면 -물론 기독교인들이 오지도 않겠지만- 모두 나에게 죽일 놈의 자식이라고 욕할 것이다. 실제로 이청담 종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동국 대학교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해서 종교계를 대표해서 헌화를 했다. 이 장면이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저 사람 빨리 불교로 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편협한 사고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는 겸손하게 배워야 한다. 물론 우리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먼저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종교의 역할에 관한 문제이다. 다양한 정체성이 모여 실천의 영역에 들어갈 때 공동의 광장이 확인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을 여해는 크게 두 가지 영역에서 규명한다. 하나는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이루는 인간존재의 “인간화”라는 영역을 공유해야 하며, 또 하나는 인간화를 구현하는 삶의 실천영역이라 규정한다. 그 구체적 실천과제를 여해는 환경과 생태문제, 생명문제, 인권문제, 성차별 문제, 빈부문제, 남북문제 등을 꼽는다. 논자는 이런 실천 영역에서의 공통광장을 종교의 “사회성”(sociality)이라 부르고 싶다.
여해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자: “오늘의 상황에서 선교활동이란 무엇인가? 바로 ‘인간화’이다. 사람은 사람대우를 받고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즉 성서에서 말하는 ‘평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선교 활동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선교 활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기독교만이 해야 하는 일인가? 남북문제, 환경 문제, 생태계 문제, 생명 문제를 가지고 종교 간의 대화가 여러 번 열렸다. 한국에서도 열렸고 아시아에서도 열렸다. 그런데 대화하다 보면 이론적으로 제일 뒤떨어진 종교가 기독교임을 알 수 있다. 불교도 우리하고 보는 시각이 다르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오늘날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를 찾다보니 생명 문제, 환경 문제, 인권 문제, 성 차별 문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문제, 남북문제 등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어디 이 문제가 기독교만의 문제이겠는가? 다른 종교와 협력해야 한다. 실제로 협력하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 다른 종교뿐만 아니라 무신론자들과도 연대해야 한다.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바로 종교 각자의 독자적 정체성과 종교 모두의 공동적 사회성을 어떻게 접목시켜서 독자적 정체성이 사회적 공동체를 생산적으로 형성해가고, 동시에 사회적 공동체를 이루는 정체성이 고귀한 모습으로 발현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여해 자신은 이 양자의 결합의 문제를 여러모로 고민하고 나름대로의 대안을 모색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미 1965년 종교인 대화 모임을 처음 출범 시킬 때부터 분명한 자기 입장을 표출하고 있으며, 그런 입장이 후대에 들어 와서도 변치 않고 계속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자기의 신앙에 대상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적 복종은 그것이 강할수록 겸손해지고 타자를 향해서 개방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진정한 종교적 신앙에 사는 종교인이라면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인의 주체의식이 명백해야 하는 동시에 타자를 향한 겸손과 사랑으로 대화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 종교나 그 종교의 진리의 선포를 위한 선교적 사명감이 투철할수록 그 선교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사는 인간이 문제가 안 될 수 없다. 동포 혹은 이웃·겨레라는 말로 불리어지는 인간의 고통과 행복이 문제가 안 되는 종교가 있을 수 없고 그것이 문제가 되는 종교라면 그런 인간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만능약이 배타적으로 자기들만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다른 종교뿐 아니라 아무 종교도 안 갖고 있는 무종교인과의 공동과제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하물며 종교인인 까닭에 가지는 공약수가 훨씬 더 큰 것은 자명의 이치인 것이다.」
셋째로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은 “종교혼합주의”도 아니고 반대로 “종교 간의 배타주의”도 아님을 천명한다. 이 두 극단주의는 대화는 물론 협력을 불가능하게 한다. 구체적으로 상세한 설명이 없더라도 두 극단주의의 부정이 곧 대화와 협력에 임하는 종교의 공통적인 같음의 입장일 것이다.
여해의 설명을 들어보자: “모든 종교는 그들이 믿는 신앙의 대상을 유일한 진리로 절대화함으로써 비로소 그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것저것 합해서 비빔밥식 종교혼합이 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된 혼합종교는 종교의 과제를 논하기 전에 종교 자체에서부터 타락해 버리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기에 우리가 종교인의 공동과제를 논할 때에 이러한 근원적인 사실을 명백하게 해야 한다. 그런 것은 종교를 논하는 이상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자명한 이치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명백하게 하면 할수록 어느 종교이건 두 가지 사실에 부딪치게 된다.
그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신앙의 대상이 교리라는 글자로 설명되어지는 이론이냐? 하는 사실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 자체가 절대적이 못 되고 상대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라면 보편성을 가진 진리라야 하고 어느 장소의 누구에게나 타당되는 진리라야 절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극적인 진리를 설명한 이론이 교리일 수는 있어도 어느 종파에 속하는 사람에게만 배타적으로 타당되는 이론이 신아의 대상일 수는 없다. 그러기에 어느 종교이든 그들이 믿는 신앙의 대상이 절대적인 것일진대 그것을 믿는 신자 자신은 절대적인 진리의 소유자로 자처하고 배타적으로 고립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 태도는 WCC회의 때마다 문제가 되는 혼합주의(syncretism)이다. 혼합주의는 앞서 설명한 대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혼합주의라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각 종교에서 좋은 점만 모아서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것은 부분적인 정당성이 있을지 몰라도 옳은 방식이 아니다. 이런 태도는 종교의 고유한 정체성을 희석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은혜, 진리, 생명이 가득 차 있다는 신앙은 결코 버릴 수 없다.”
여기서 여해는 종교 간의 입장에 대한 두 가지의 극단주의 곧 배타주의와 혼합주의를 분명히 배격한다. 그렇다면 여해가 말하는 “정체성”과 “사회성”의 상보적 결합 곧 대화하며 협력하는 상승적 결합의 모습은 무엇일까? 여해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개념화 하지 않는다. 논자가 보기에 여해의 그것은 일종의 “포용주의”(inclusivism)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절대화하여 다름을 우상숭배로 죄악시 하는 “배타주의”(exclusivism)는 물론 아니고, 정체성을 상실한 채 종교적 비빔밥처럼 퇴락한 모습의 “종교혼합주의”(syncretism)도 배격한다.
실제로 포용론의가 담고 있는 “정체성”과 “사회성”의 상관관계는 항상 갈등 없는 관계가 아니다. 긴장과 대결이 그 속에 존재한다. 긴장과 대립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관리하고 조정하여 화합과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논자의 생각으로는 둘 사이의 긴장속의 상보관계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편 여해 자신은 비단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의 영역에 국한 시킨 것은 아니지만 사회구조 전반 내지 인간의 삶의 양식의 전반을 놓고 긴장관계속의 화이부동을 “사이·너머”(Between and Beyond)로 설명하고 있다. 정체성이 너머의 성격 쪽이라면 사회성은 사이쪽 성격에 가깝고, 전자를 초월이라 한다면 후자는 내재에 가깝다. 초월을 지향하는 내재와 내재 속에 참여하는 초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해의 이런 사고와 모습은 어디서 온 것일까? 여해는 이것을 종교학이나 비교종교론에서 취해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는 분명히 기독교 신학적 본질을 꿰뚫어 보고, 거기서 이런 화이부동적 「사이·너머」의 원리를 터득했다고 생각한다.
Ⅲ. 「사이·너머」의 세상
여해의 신학적 사고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학」이 자리하고 있다. 성육신학은 두 가지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심”(요한복음 1:14)으로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스스로 만드사 세상 속에 내재하신다. 이것이 내재의 근본이요, 내재하신 그리스도는 세상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이시다. 이 현존성이 “사이의 삶”을 가능케 한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 상호간의 삶,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사이” 적 공존을 만들어 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사이”세계의 “비사이적” 죄악세계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피조물 곧 진정한 사이세계를 만드셨다. 그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 이상을 실현하는 세계이다. 이 나라에서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종교와 이념이나 권력도 스스로 절대화 할 수 없다. 이것들의 절대화가 곧 우상이다. 하나님은 바로 우상의 세계를 심판하시며 동시에 초월하시는 분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세상의 몸으로 세상에 있으나(=내재), 세상에 속하지 않는(=초월) 이중적 존재로 살아간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내재를 넘어선 초월의 실존과 존재를 입증하신 사건이다. 여해의 신학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철저히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속에 담긴 신앙고백이고, 그 고백의 실천현장이 바로 「사이·너머」의 세계였다고 믿는다.
여해는 평생 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에 진력하면서, 특히 WCC가 주창해온 종교 간의 대화 프로그람에 헌신적으로 참여한 바 있다. WCC의 경우 여해가 주창한 정체성과 사회성의 긴장속의 협력관계를 출발부터 주장해 왔다.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지키면서 세계평화를 위한 사회성에서의 종교간 협력과 대화를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기독교신앙의 핵심된 그리스도 고백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라고 고백하며, 우주적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이시고 역사케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라는 고백이다. 우주적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베푸시고 구원의 역사를 어느 종교나 교리가 제한 할 수 없다는 고백이 그 하나이다.
둘째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WCC가 대화의 상대로 삼는 종교가 처음에는 “다른 종교”(Dialogue with “other” Faiths)로 칭했다가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살아있는 종교”(Dialogue with “living” Faiths)로 바꾼 것은 커다란 폭으로의 발전일 것이다. 물론 배타주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혼합 주의로 전락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그리스도 고백이고, 그분은 “우주적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고백일 것이다.
여기서 WCC가 말하는 “살아있는”종교를 한국어가 말하듯 “이웃”종교로 바꾸어 말해도 상관없을 듯하다. 죽은 자를 이웃으로 표현할 수 없으니 말이다. 살아있는 이웃은 항상 자기 나름의 정체성이 있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의 사회성을 담는다.
셋째로 여해는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물론 자신의 답변은 있다. 이 두 질문은 여해 자신의 질문만이 아니다. 종교 간의 대화를 하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인 것이다.
그 하나는 바로 “구원”에 관한 질문이다. 종교마다 열성을 다하는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에 있다. 이 문제에 관한 여해 자신의 견해와 질문을 그대로 실어 보겠다. “다음으로 구원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자주 발생하는 문제이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나 다른 종교들도 성실하게 믿기만 하면 구원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나는 이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자기 종교 안에 구원이 있다는 주장이 없는 종교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그런 주장이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것이지, 다른 종교를 열린 자세로 대하는지에 있다. 이것이 과연 편협한 태도일까? 1961년 뉴델리에서 열린 WCC 총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다’였다. 다른 종교에서는 불타가 빛이다. 알라신이 빛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다른 종교에서 ‘왜 예수만이 빛이냐?’ 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때 비자트 후트 총무가 좋은 대답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어쩌면 배타적이고 폐쇄적일 수도 있지만 이 이야기를 정말로 잘 알게 되면, 전 우주를 품는 개방적인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우주적 그리스도이다. 빛 또한 교회당 안에만 비치는 빛이 아니다. 그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인지를 알게 되면, 그 빛이 모든 곳에 개방된 빛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또 하나는 선교 내지 “전도”의 문제이다. 이점에 관해서는 여해 자신의 입장을 실어 보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문제를 던져 보겠다. 우리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전도해야 하는가? 이것은 내게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까지를 읽으면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부탁한 대명령이 나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다른 종교인들에게 전도는 하지 않고 환경 보호나 같이 하자고 하는 태도는 옳은가? 문제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회개시켜 천당 가게 만들겠다는 태도에 앞서 우리는 그들이 믿는 신앙에 대해 경청하고 겸손히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리스도를 믿는지를 정직하게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이것이 대화를 통한 전도이다. 나머지는 성령의 역사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 기독교가 혹은 우리 교파가 독점하고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결국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구원을 믿는다면, 우리는 겸손해져야 한다.”
Ⅳ. 나가면서
앞서 살펴본 대로 여해는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운동을 출범할 때부터 “타종교”가 아니라 “이웃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을 주창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정체성”을 고수하면서도 “사회성”의 공동과제를 끊임없이 주창하고 특히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을 크게 보고 대화와 협력 운동을 몸으로, 고백으로 이끌어 오신 분이다. 그리고 종교간 담론이자 사회담론의 틀을 “사이·너머”의 긴장속의 화해와 협력으로 제안했다.
오늘의 입장에서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공동의 과제로 남는다. 종교는 그 자체로 존립할 근거는 있는가? 기독교(종교)는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존재할 때 존립목적이 정당화된다. 한국 사회는 분명히 다종교 사회이고, 그럼에도 종교 간의 폭력적 대결이나 전쟁이 없이 각자가 발전해 오고 있는 특이한 사회이다. 이런 평화의 전통은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가야할 과제가 있고, 동시에 이 과제를 “소금·빛”으로 실천해가며 발전시켜야 할 과제 앞에 우리 모두 서있다고 믿는다.
◈ 김수환 추기경이 본 이웃종교의 같음과 다름
-변진흥(김수환추기경연구소 부소장)
1.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시대정신과 김수환 추기경의 리더십
가톨릭은 1964년 5월 17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로마 교황청 안에 다른 종교와의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한 기구 하나를 곧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이틀 뒤인 5월 19일, 비(非)그리스도교 사무국(the Secretariat for Non-Christians)이라는 새로운 독립 부서를 설립했다. 이 비그리스도교 사무국의 명칭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8년에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Pontifical Council for Interreligious Dialogue)로 개칭했다. 이 시기에 김수환 추기경은 유럽 한 가운데 위치한 독일에 있으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엮어내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56년 10월부터 1963년 11월까지 만7년 1개월 동안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4년 동안 4회기로 나뉘어 개최되었고, 김 추기경은 이 가운데 1963년 9월23일에 첫 회기가 열린 것을 직접 보고 귀국한 후 1964년 6월에 당시 가톨릭의 유일한 언론매체였던 가톨릭시보 사장으로 취임, 지속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관심을 쏟았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표방한 ‘교회 쇄신’(aggiornamento, 적응-개혁과 쇄신)의 시대적 과제의 중요성을 한국가톨릭의 어느 누구보다 먼저 이해하고, 그 현실적 의미를 한국가톨릭과 사회에 적용시키고자 노력했다. 아조르나멘토라는 구호는 현대 가톨릭이 안으로의 자각과 밖으로의 개방을 이끈 ‘시대의 징표’였다. 그의 이같은 시대정신 이해는 그가 1966년 2월에 주교로 서품되어 마산교구장이 된 후 불과 2년 만인 1968년에 서울대교구장이 되고, 다음 해인 1969년에 한국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됨에 따라 현대 한국가톨릭을 대표하는 리더십의 중핵적인 요소로 자리매김 되기에 이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회리더십은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교회를 뜻한다, 이는 그 이전의 모습 즉 ‘교회를 위한 사회’라는 종래의 패러다임을 정반대로 즉 ‘사회를 위한 교회’의 존재양식으로 전환시킨 것으로 김 추기경은 이와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에 깊이 천착했다. 그의 이같은 인식은 사회를 향한 사랑과 대화의 발걸음으로 구체화되었고, 이웃종교를 향한 대화의 발걸음으로 이어졌다.
2. 이웃종교와의 동반 : ‘같음’의 길
김수환 추기경이 한국가톨릭을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이웃종교와의 대화 파트너로 행보를 갖기 시작하는 것은 1968년 5월29일에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여 전임 노기남 대주교를 잇게 되면서부터 이다. 김 추기경은 1968년 12월21일 천도교 강당에서 개최된 한국종교인협회 제4회 정기총회에서 각 종단대표로 구성되는 의장단에 선출되어 공식적인 동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때 구성된 의장단은 김 추기경 외에 개신교 강원용 목사, 불교 이청담 스님, 원불교 김대거 종법사, 대종교 안호상 박사, 천도교 최덕신 교령, 유교 이정호 등이며, 강원용 목사가 회장으로 선출되어 초창기 한국종교대화운동의 틀을 구성하게 된다.
특히 강원용 목사는 크리스천아카데미를 창설한 후 한국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대화의 통로를 마련하고, 중간집단을 육성하고자 했으며,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각 분야별로 파악하고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강 목사는 그 가운데서도 종교대화운동을 중시하여 김 추기경과 청담 스님 그리고 이후 법정 스님에 이르는 3대 종단 지도자의 권위를 부각시키는 독특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게 된다.
김수환 추기경은 국내에서의 종교대화뿐 아니라 국제사회 특히 아시아종교계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하게 된다. 교황 바오로6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실을 아시아에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 1970년 11월에 필리핀을 방문하여 마닐라에서 아시아의 주교 18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아시아지역 주교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주교회의는 그 결의사항을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상임기구 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되고, 이듬해인 1971년 3월 홍콩에서 이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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