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초당대 문현철(45·사진)교수는 대중에겐 알려지지않는 ‘그만의 법정 스님’을 간직하고 있다.
문 교수가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고교 2학년 때인 82년 12월초였다. 시골 중학교에서 전교 1~2등을 하다가 광주에 올라와 떨어진 성적 때문에 말못할 방황을 하고 있을 때 학교 상담교사가 법정 스님의 책 <산방한담>을 읽어보면 마음이 풀릴 것이라고 했다. 하루밤만이 <산방한담>을 읽은 지 일주일 후 평소 좋아하던 광주광역시 금남로1가에 있는 클래식음악감상실 베토벤에 들렀는데, 그 곳에 꿈에 그리던 법정 스님이 있었다. 바로크시대의 클래식음악을 좋아했던 법정 스님은 불일암에서 광주에 올라오면 그 감상실에서 지인들을 만나곤 했다. 그는 법정 스님 앞에 앉아 “왜 스님이 되셨어요?“라는 등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가톨릭 입문을 준비중이던 그는 다음해 3월 다니던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 큰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메다 1주일만에 깨어났다. 5월말 퇴원하자마자 조계산 불일암을 찾았다. 법정 스님은 텃밭에서 딴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싫은 것도 좋은 것도 별로 표현하는 법이 없고, 잔정을 보이지않던 법정 스님은 그의 홀쭉해진 몸을 보고 “다쳤어”라고 한마디 뿐이었다. 그는 스님에게 “하느님이 계시다면 나를 친 차를 붙잡아주지않고 영세받은 바로 그날 들이받게 내버려둘 수 있겠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법정 스님은 “천주님은 그런 만화 같은 일을 하는 분은 아니다”면서 “이런 아픔을 통해 네가 더 성숙해져, 더 큰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문 교수는 “무소유 등에 대한 스님의 말씀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늘 희망과 긍정을 일깨우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의 도움으로 살면서 조선대 법대 1학년 1학기를 겨우 마치고 더 이상 등록금을 낼 수 없어 학업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러 방황하던 그가 불일암을 찾아갔을 때 스님은 불현듯 “등록금 고지서를 베토벤에 맡겨놓으라”고 말했다. 그 때부터 졸업 때까지 빠짐없이 등록금을 부쳐준 스님은 그가 추천한 가난한 친구 3명의 등록금도 졸업 때까지 도와주었다. 그러면서도 도움 받은 사실을 일절 함구토록 해 지금까지 입도 뻥긋 할 수 없었다. 그가 은근히 불교로 개종 의사를 내비치지 빙그레 웃던 스님은 누구는 청국장을 좋아하고, 누구는 김치찌게를 좋아할 뿐이지만 천주님의 사랑이나 부처님의 자비는 풀어보면 한보따리”면서 “그대로 있어라”해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않은 채 지금까지 가톨릭 신앙을 지키면서 그를 스승으로 따를 수 있었다.
법정 스님은 불일암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고향 땅과 많은 지인들이 있는 땅을 떠나 강원도 오지로 들어감으로써 둘의 만남은 이어지지 못했다. 문교수도 “익숙한 것들을 뒤로한 ‘제2의 출가’ 정신을 존중해 스님을 찾지않았지만, 스님은언제나 내 마음의 산이었다”고 말했다.
조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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