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역사기행 <상> 만주벌판
법륜스님 역사기행 <하> 잃어버린 상고사를 찾아
오랑캐 땅이라 내쳤던 요하, 중국문명 기원 각색
영토 넘어 역사마저 잃은 ‘이방인’으로 망연자실
심양은 중국 동북지방 최대도시다. 드라마 <주몽>에서 고구려 창업의 기초를 다지고, <연개소문>에서 수·당과 고구려 장수들이 쫓고 쫓기는 혈투를 벌이던 랴오허강(요하·療河) 유역이며 ‘요동’에 속했던 곳이다. 옛이름 봉천(奉天)이다. 면면히 이어져온 천손민족의식 때문일까. ‘하늘을 받든다’는 그 이름이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심양 시내에 요녕성박물관이 있다. ‘요하문명전’이 열리고 있는 박물관 입구엔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끝이 안 보인다. 세계 역사를 다시 쓰게 한 이 지역 ‘요하문명’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온 사람들이다.
[하니TV]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난 ‘역사 기행’
빗살무늬토기, 적석총, 비파형 동검…, 너무나 익숙한 것들
‘요하문명전’이 열리는 박물관 3층의 세개 전시관에 들어서자 수천년 동안 우리의 무지의 벽 속에 갇힌 뇌를 문명의 방망이가 거침없이 두드린다. 그릇과 옥 귀걸이와 무기들의 정교함은 용산국립박물관에 전시된 1천여년 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일 만큼 정교하다. 놀랍다. 충격은 정교함 때문만이 아니다. 그런 유물들이 이미 기원전 3500년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에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더욱 더 큰 충격은 ‘내 의식 저 너머’인 이곳에 전시된 빗살무늬토기와 고인돌과 적석총과 비파형 동검들이 너무나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는 것. 한반도 남쪽의 박물관에서 흔하게 보았던 동질의 유물이다. 반면 요하 서쪽 중국의 대륙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이질적인 유물들이다. 더구나 기원전 350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제단, 여신묘, 적석총군은 이미 5천년도 더 전에 ‘국가 단계’의 조건을 갖춘 문명사회가 실존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기행단 가운데 대기업 간부인 남호일(56)씨는 “중국도 인정한 요하문명에 대해 우리나라에선 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냐”고 안타까워했다. 우리가 오직 신화와 전설만으로 치부한 채 단 한쪽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역사책에 갇힌 한국의 순례단의 가슴에 환인-환웅-단군의 혼과 손길이 닿은 비파형 동검이 깊숙이 꽂혔다.
압록강까지 천릿길엔 고주몽의 고구려 유적 지천
중국은 전통적으로 만리장성 밖인 요하일대를 ‘문명화된 중화민족의 터’와는 달리 ‘동이족과 야만적인 북쪽 오랑캐의 땅’으로 구분지었다. 그런데 30년 전부터 황하문명을 비롯한 ‘세계 4문명’보다 더 앞서고 발달돼 세계문명사를 다시 쓰게 한 유물들이 이 지역에서 쏟아지자 요하지역이 ‘동이족과 북쪽 오랑캐의 땅’이 아니라 ‘중국문명의 기원지’라는 ‘공정’을 진행하며, 2006년 말에 이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 예비명단에 올려놓았다.
요하의 유물을 살피던 한국기행단의 입에선 감탄에 이어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나온다. 무엇일까. 그리스나 이스라엘, 인도 역사지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리 상고사의 무지에 대한 자탄일까. 박물관을 빠져나오자 ‘중국에서 세계 문명의 발상지가 나왔다’는 자긍심을 얻으려 열광하는 중국인들이 더욱 장사진이다. 그들이 영토만이 아니라 역사마저 잃어버린 ‘이방인들’을 뜨악하게 바라본다.
이곳에서 압록강까지 천릿길엔 ‘47대 단군고열가의 후손’이라 칭한 고주몽의 나라 고구려 유적이 지천이다.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주몽은 중국민족의 시조인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高陽氏) 전욱과 고신씨(高辛氏)의 ‘고’(高)자를 딴 인물이 되어 있다. ‘붉은 악마’가 열광했던 ‘14대 환웅 치우’가 아니라 그의 적이었던 황제 헌원의 후손으로 뒤바뀐 셈이다.
풀만 무성한 독립투사 무덤들, ‘역사 왜곡’ 중국만 탓하랴
고구려를 더듬으며 가는 길에 백두산 아래 화룡에서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 터를 거쳐 ‘대종교 3인묘’에 이르니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기행단의 탄식은 다시 자탄으로 바뀐다. 역사는 ‘사실’이 아니라 ‘힘의 기록’인 것인가. 단군의 혼을 되살려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초대 교주 나철(1863~1916)과 서일(1881~1921), 김교헌(1868~1923) 3인의 무덤은 아무도 찾는 이 없이 이국의 들판에 풀만 무성하게 덮인 채 나란히 누워 있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의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선생을 비롯해 29명 가운데 21명이 대종교인이었고, 김좌진·홍범도 등 전설적인 항일전사들의 다수가 대종교인이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민족을 위해 온몸을 불살라버려 재가 되었다. 대신 살아남은 종교와 인사들이 자신의 공을 한껏 드러내는 사이 무덤 하나 돌보지 않고, ‘대종교’라는 이름 하나 기억하지 않아 저울추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것이 ‘실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눈앞의 역사였다. 어찌 ‘역사 왜곡’을 중국만 탓할 수 있을 것인가.
기행단이 고구려의 400년 수도 국내성에 머문 다음날 새벽 3시 압록강가를 달려 산길을 30분가량 올라 찾은 곳은 국동대혈(國東大穴)이다. ‘수도의 동쪽에 있는 큰 혈자리’란 뜻이다. 하늘로 통하는 듯 기암괴석 입구엔 과연 ‘통천동’(通天洞)이라고 쓰여 있다. 고구려의 왕들은 양쪽으로 뚫린 이 동굴에서 해마다 10월이면 군신들을 거느리고 와서 환인-환웅-단군을 모시며 천제를 지냈다.
그 통천동 남쪽 400미터 앞엔 북한과 경계인 압록강이 있었고, 서쪽 아래로는 일제가 100년 전(1909년 9월 4일)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협약’을 통해 청에게 넘겨준 광대한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영토가 펼쳐져 있었다.
1천여년 전 천제의식을 되살려 환인-환웅-단군에게 술을 따르며 절을 드렸다. 고려대 1학년 우경락(19)군은 “우리가 배운 역사가 어떻게 이렇게 잘못 되었느냐”며 기막혀했고, 고속철도 기관사 강은옥씨는 “우리(한민족)는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어린 아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천제 뒤 손을 맞잡자 누군가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합창을 시작한다. 이들이 흘린 통한의 눈물 방울 방울이 단절된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역사기행 이끈 법륜 스님
“남북 하나 될 길은 ‘이념’ 아닌 ‘역사’라는 생각에 나서
‘한 뿌리’ 고대사 인식 부족해 동포 굶어 죽어도 무관심”
지난 2일부터 간도 일대에서 일반인과 대학생들 각각 1백여명씩을 대상으로 7박8일씩 연이어 매년 역사기행을 이끈 법륜 스님이 이곳에 온 것은 1993년이었다. 1980년대 민주화 이후 통일운동도 시들해지고, ‘꼭 통일을 해야 하느냐’는 얘기까지 나오는 시점이었다. 그는 남북이 하나 될 길은 ‘이념’이 아니라 ‘역사’에 있다고 보고 정토회 실무자 7명과 함께 지도 한장 들고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나섰다.
도움을 받기 위해서 처음엔 조선족들을 찾아나섰지만 조선족들조차 중국사만을 배워 뒷동산에 있는 고구려와 발해의 성터마저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절벽으로 이뤄진 고구려 졸본성 아래에서는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중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오듯 군사기지의 케이블카가 내려와 무작정 올라타 주몽의 흔적을 밟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가 1990년대 중반 북녘 동포들의 기아실상을 남한 사회와 국제사회에 알리며 동포돕기에 나선 것도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샅샅이 뒤지던 과정에서 동포들의 실상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민족에 대해 막연한 관념만 가진 채 우리가 실제로 한 뿌리라는 고대사의 역사인식이 부족하기에 북한에서 수백만이 굶어 죽는다고 해도 마치 남의 일처럼 무관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며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세상을 떠돌아도 아이가 태어나면 자기 나라 역사와 말부터 가르치는데 우리 민족, 특히 젊은이들이 민족의 뿌리가 정립되어 있지 않아 뿌리 없는 부평초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없는 역사를 만들어 터무니없이 내세우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역사적으로 처한 존재의 실상을 바로 알아야 어처구니없는 국수주의나 지나친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가지고 당당해질 수 있다”며 “자기를 알아야 타인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법륜 스님은 “우리 민족이 각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토대는 삼국시대 이전까지 대륙을 무대로 중국민족에게 문명을 전해주었던 상고시대 문명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서 “애초 고조선이라는 말은 없고, 조선이 있었으며 그 조선을 잇겠다는 의미로 이씨왕조가 조선이름이라는 이름을 땄고, 고려도 고구려를 잇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며 대한이란 말도 한인(환인)의 한(큰)나라를 딴 말인데 우리는 정작 본래의 역사는 망각해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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