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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마음산책

하늘이 내어준 요새 졸본, 물에 잠자다

등록 2009-08-12 10:39

‘민족 뿌리 찾기’ 법륜스님 역사기행 <상> 만주벌판

역사기행<하> 잃어버린 상고사

거대한 댐에 고구려의 숨결은 고스란히 수몰

유일하게 남은 발해 영광탑은 광야서 피울음

 

 

지난 2일부터 9일까지 7박8일간 매일 새벽 3~4시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만주벌판 2천여㎞를 누볐다. ‘좋은벗들’과 평화재단 이사장인 법륜(정토회 지도법사) 스님이 이끄는 90여명의 탐방단과 함께였다. 법륜 스님은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필리핀 민다나오 등에서의 구호활동으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국제적 인도주의실천운동가이면서, 다른 한편에선 우리 민족의 뿌리 찾기에도 남다른 열정을 불태워왔다. 남북이 하나로 만나기 위한 열쇠는 ‘이념’이 아니라 원래 한뿌리였던 ‘역사’라고 보는 그는 1995년부터 한해도 빼지 않고 15년째 만주벌판을 누비며 ‘민족의 뿌리 찾기’ 역사 기행을 이끌어왔다. 그의 역사기행은 죽은 뒤의 극락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우리 스스로 정토로 만들어가는 보살도를 실천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하니TV]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난 ‘역사 기행’ 1

 

철벽 요새도 마음에 틈새가 생기면 한순간에 와르르  

 

반도에서 천리 길인 심양공항에서 내려 순례단이 찾은 첫 고구려 유적은 요녕성 요양 동쪽 백암산성이다. 도도히 흐르는 태자하 강가의 한적한 시골마을 옥수수밭 너머 초원 위에 올라선다. 아직도 고구려의 기상은 죽지 않은 것인가. 400여미터나 튼실하게 10미터 높이로 쌓인 산성이 1500여년 간 흔들림 없이 서있다. 흙을 섞는 일반적인 산성과 달리 돌로만 쌓은 것이다. 평지에서 살다가 전시가 되면 적군에 맞섰던 곳이다. 정상에 올라서니 한쪽은 강고한 성이요, 왼쪽 태자하강 쪽은 절벽이다. 하지만 어떤 요새도 마음의 틈새가 생기면 무력해는 것인가. 당태종에게 고구려의 요동성이 함락됐다는 소식만 듣고 성문을 열어줘버린 백암산성의 무력함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당태종 이세민의 50만 대군을 격퇴한 양만춘의 안시성 결전과 비교돼 천년 넘게 회자되고 있다. 문제는 결국 의지이며, 정신인가. 지금 우리의 의지는 백암산성일까, 안시성일까.

 

고구려 패망의 아픈 역사 현장을 떠나 7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려 향한 곳은 오녀산성이다. 환인이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 사상’을 지녔던 이들을 위해 특별히 내어준 땅일까.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졸본성이 선 오녀산성이 있는 곳의 지명이 우리 민족의 시원과 동명인 ‘환인’이다. 환인의 비류수(혼강)을 지나니 거대한 댐이 가로막고 있다. 졸본성을 둘러싼 저 댐 건설과 함께 수많은 고구려의 역사도 수몰됐다. 600~800m 고도의 평지에 있는 졸본성을 향한 산길은 40~50도의 경사로여서 탐방객의 숨결이 거칠어진다. 나머지 삼면은 천길낭떠러지다. 따라서 정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 이 정도이니 졸본성이야말로 주몽을 위해 하늘이 감춰둔 ‘천혜의 요새’가 아닐 수 없다.

 

만주의 어원은 지혜와 용맹의 상징인 문수보살

 

 

주몽의 아들 유리왕이 옮긴 국내성 옆 칠성산의 환도산성도 3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하요새다. 20대 장수왕까지 400여년 간 고구려 정치의 중심지 국내성 옆에선 여전히 압록강과 통구하의 물이 만나 어우러지고 있다. 

 

1100개의 큰돌로 쌓아 ‘동양의 피라미드’라는 장군총과 거대한 돌비석 광개토대왕비와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춤추는 고분 벽화에서 잃어버린 고구려의 웅혼을 만나면 고조선의 광대한 영토를 되찾겠다는 고구려인의 ‘다물’은 커녕 옛고구려의 변방마저 지키지 못한 역사에 탐방객들이 아파한다.

 

법륜 스님은 1960년대 경북 경주의 경주고 재학시절 영남불교학생회를 만들어 신라의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한 가정 한 기와 보존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그는 ‘신라인의 후예’로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신라의 문화유산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민족 역사의 정통성은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에 둔다. 수천년간 대륙을 무대로 이어져온 한민족의 역사를 반도 남쪽의 2천년 역사로 국한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역사 왜곡이라는 것이다.

 

이번 기행에 동행한 전남 보성 대원사 현장 스님은 ‘만주’라는 어원은 문수보살의 팔리어인 ‘만주시리’에서 왔다고 한다. 지혜와 용맹의 상징인 문수보살처럼 지혜롭고 용맹했던 우리의 조상들이 누볐던 곳이 바로 만주벌판이라는 것이다. 

 

서태지가 불렀던 ‘발해를 꿈꾸며’를 아프게 읊조리며

 

고구려를 계승했으면서도 한민족의 역사의식 속에서 더욱 더 멀어졌던 발해의 옛터전에 가면 탐방객들의 아픔은 배가되기 마련이다.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천리길을 가면 목단강 중류의 상경용천부에 발해의 옛수도가 있다. 

 

이곳에 발해인들이 세웠던 9개의 절 가운데 유일하게 흔적이 남은 절터인 흥륭사엔 보통 절집에 있는 1~2m 석등보다 훨씬 큰 5m 높이의 석등이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발해시대 주작대로의 폭은 110m였다고 한다. 서울 광화문 세종로의 폭이 100m이니 발해인들의 웅대한 스케일을 짐작할 만하다. 고구려 영토보다 두배나 넓었던 발해였다. 그래서인가. 발해에 대한 중국인들의 견제 또한 강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구려 유산과 달리 발해 유적에 대해선 아예 사진 촬영조차 금지시킨다. 반경 16㎞의 거대한 성인 상경성에서도, 대조영이 발해 건국의 씨앗을 뿌린 대석하 강가의 동모산에서도 중국 안전부 요원들과 공안들이 따라다니며 철저히 감시한다. 상경성 입구에 중국정부 흑룡강성에서 세운 푯말에 ‘발해는 흑수말갈이 세운 나라’란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불렀던 ‘발해를 꿈꾸며’를 아프게 읊조리며 찾은 인근 식당에선 조선족 한명 찾을 수 없음에도 달디 단 수박과 참외는 물론 배추김치와 무김치도 중국의 맛이 아닌 우리의 맛이 완연하다.

 

중국의 장백과 무역거래를 하는 북녘 혜산을 내려다보는 길림성 백산시 장백현 탑산에 올라서면 우람한 영광탑이 서있다. 유일하게 남은 발해인들의 탑은 저기 압록강 너머로 쫓겨가버린 한민족을 건너다보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북녁동포가 배를 부여안고 넘었던 강물과 북쪽 땅을 내려다보아왔다. 누군가의 입에서부터 <광야에서>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땅의 피울음 있다/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해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우리 어찌 가난하리오/우리 어찌 주저하리오/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진 뜨거운 흙이여”

 

한명 한명의 합창이 점차 내면의 의식으로 채워진다. 대륙의 기상을 잃어버린 채 반도에서마저 갈갈히 갈라진 우리들의 마음에 영광의 탑을 세우듯이.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동영상 박종찬 기자, 박수진 피디

 

◈ 현장에서본 중국의 동북공정 실상

 

안전부 요원과 공안 경찰, 걸음 걸음 감시

한족 이주정책으로 조선족자치주 씨 말라

 

현재 중국 영토의 과거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정의를 내린 중국 정부 차원의 움직임은 역사기행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채 안내하는 여행사에 제재를 가하는 중국에선 발해의 유적과 같은 역사 유적 탐방 때 안전부 요원과 공안 경찰이 따라다니며 탐방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또한 탐방단이 조상의 유적지와 묘지에 몇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거나 절을 하는 것도, 플래카드를 내거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티베트나 위구르지역과 마찬가지로 조선족 자치주에 대해서도 중국 정부의 한족 이주정책으로 인해 조선족 비율이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조선족 학교도 문을 닫고 있다. 조선족자치주가 명맥뿐인 지역도 적지않다. 가령 대조영이 고구려 부흥의 기치를 들고 발해 건국의 씨앗을 뿌렸던 돈화지방은 조선족 비율이 4%로 줄었다. 그러니 조선족자치주이면서도 우리말을 알아듣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족에 대한 한국 정부 차원의 지원도 없다.

 

중국정부는 특히 한민족의 정신적 고향으로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 천지 일대를 길림성의 직할 자치주로 만들었다. 백두산에 공항이 신설되면서 백두산관광객들이 조선족 자치주의 중심 구실을 했던 연길에 들릴 일도 없게 됐다. 사실상 조선족의 중심인 연길과 백두산이 단절된 셈이다. 90년대까지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의 90%가 한국인이었지만 지금은 관광객의 90%가 중국인이다. 한민족의 성산이 중국인들의 유람산으로 급변해가고 있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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