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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마음산책

검찰도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뎌라

등록 2009-05-27 11:35

  

 ‘두뇌’들이 멸시한 ‘바보’는 죽어서 살아있는데…

 사실이라도 형평성 잃으면 진리도 법도 아니다

 

 

 “벼랑 끝에 서서 한발을 더 내디뎌라.”

 이것은 옛부터 선가(禪家)의 법어였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하면, 시방세계현전신(十 方 世 界 現全身)이라고 했다. 즉 천길 낭떠러지에서 한 발을 내디디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지난 23일 새벽 경남 김해 봉하마을 봉화산의 험준한 절벽인 부엉이바위의 벼랑 끝에서 이렇게 한발을 내딛었다.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과 검찰과 조선·중앙·동아일보가 벼랑 끝에서 그의 등을 떠밀었다고 하고,  혹자는 사실상 ‘명예 사형 선고’가 내려진 그가 산송장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존엄사를 택했다고도 한다. 어찌됐든 결국 벼랑에서 뛰어내린 최후의 결단자는 노무현 바로 그였다. 그가 벼랑 끝에서 한 발을 떼는 순간 과연 선사들이 말한 대로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을까. 

 노 전대통령이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고 했듯이,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닐 수 있다. 임사체험자(한번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들)의 증언들에 따르면 육신의 호흡은 끊어진다 하더라도 영혼은 엄연히 살아서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뛰어내리기 전 생지옥보다 좋아졌으리라 위안할 뿐

 

 그래서 그가 마치 이를 알고 유언한 것처럼 (나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있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라”고 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런다 하더라도 이미 육신을 떠난 영혼을 이승의 사람들은 볼 수 없고, 그의 말을 더는 들을 수 없다. 다만 입관식에 참여한 이들이 고인의 모습이 마치 곤히 자는 것처럼 평안해 보였다고 하니, 그의 상태가 뛰어내리기 전 생지옥보다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나빠졌을 리 없으리라 위안할 뿐이다.

  선가에서 ‘백척간두진일보하라’는 것은 실제 몸을 던져 죽으라는 의미는 아니다.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즉 끝까지 붙들고 놓아버리지 못하는 ‘나’를 버리라는 것이다. 말기암에 걸려서라도 끝내 약물과 기계에라도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려고 몸부림칠 만큼 인간이 가장 놓지 못하고 애착하는 것이 우리의 몸뚱이인 것을 생각한다면 몸뚱이를 내던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결단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 없는 일이다.

 그래서 종교에선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린 순교자를 성인으로 숭배한다. 가톨릭에선 위대한 인물들을 사후에 성인으로 추대하는데, 성인이 되려면 그와 관련한 ‘기적’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경우 그 행위 자체를 기적으로 간주해 다른 기적 요건을 요구하지 않는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고 했듯 만신창이가…

 

 고인의 영혼 여행을 함께 할 수 없으니, 그에게 어떤 세상에 펼쳐졌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벼랑 끝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 저승이 아니라 이승에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나락으로 떨어져만 가던 ‘노무현’의 명예는 회복되고, 그의 존엄성은 회생했다. 기적이다.

 만약 그가 벼랑 끝에서 한 발을 내딛지 않았더라면 그가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고 했듯이 그의 단죄에 나선 이들은 그의 존엄성이 유지되도록 두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벼랑 끝에서 떨어진 몸뚱아리보다 더욱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노 전대통령은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고 했을 것이다. 노 전대통령이 절벽에 떨어진 날 봉하마을에 도착한 한 측근은 이명박 대통령과 검찰, 보수언론 조·중·동을 거론하며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고 외쳤다.

 

 

 비단 이번 일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현대사의 비극의 중심에 독재권력과 보수언론의 왜곡이 자리하곤 했다. 따라서 권력구조 개편과 언론의 제자리 찾기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번에 특별히 주목할 것이라면 셋 가운데 단연 검찰이다. 권력을 뺏고 뺏기는 정치의 세계야 애초 비정하고, 여야란 공인된 적대적 관계다. 페어플레이와 탈권위를 내세운 노 전 대통령 같은 이가 바보로 치부되는 그런 곳이다. 언론 또한 미국처럼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를 밝혀야 하는 시점이 되지않았느냐는 논의가 나올 만큼 이미 자신의 정파색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들은 색깔이 다른 진영에 대해선 상대방이 권력자든 아니든 상관 없이 대립각을 분명히 한다.

 

 검찰이 칼 거꾸로 겨누면 이명박 대통령 ‘복장’은 어떨까

 

 그러나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며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인 검찰은 다르며, 달라야 한다. 법(法)은 종교에선 진리(다르마)로 통한다. 진리란 진실한 것이다. 검찰은 사실조차 입증하기 어려워 비본질적인 명품시계 등의 얘기를 흘려 망신을 주려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형평성을 잃으면 이미 진리도 법도 아니다. 세속 법에선 매를 때린 행위만을 중요시하지만 진리의 법에선 그 ‘의도’가 더욱 더 중요하다. 즉 마음이다. 같은 매도 분노의 매가 있고, 사랑을 담은 눈물의 매가 있다. 같은 칼이라도 너와 나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칼은 고름을 빼고 암을 도려내고 혈을 뚫는 활인검이 되지만, 보신과 권력에 대한 아부와 치기의 마음으로 휘두른 칼이라면 그것은 살인검일 수밖에 없다. 칼도 같은 칼이 아니며, 법도 같은 법이 아니다. 문제는 칼이나 법이나 사실이 아니라 그를 쓰는 마음의 자세다.

 

 만약 검찰이 현재의 마음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정권 안보의 수문장이 되겠노라며 깊게 고개를 숙이다가 어느날 태도를 돌변해 언제 보았느냐는 식으로 안면을 몰수하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에게 칼날을 겨눈다면 이명박 대통령의 마음은 어떠할까. 복장이 터질 듯 분해 영일만 앞바다로 몸을 던지고 싶은 심정이 될 날이 없으리라고 과연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은 중세 암흑시대가 아니다. 21세기 시민사회다. 하지만 최고의 두뇌들이 모였다는 검찰이 시민사회의 성숙도면에서 ‘무뇌’로 비친다면 그것은 검찰만의 불행이 아니다. 여러 분야를 객관적으로 놓고 보더라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검찰의 행태는 용인받기 어렵다. 선출직인 대통령이야 5년 임기가 끝나면 끈 떨어진 연이 되고, 조·중·동의 기자도 그만두면 거의 할 것이 없다. 하지만 검사를 그만 두더라도 변호사라는 최고의 자격증이 보장되는 검사들이 왜 그런 것일까.

 ‘두뇌’들이 멸시한 ‘바보’는 백척간두에서 한발을 내딛었다. 세상엔 죽어도 사는 사람이 있고,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다. 과연 우리의 젊은 검사들 가운데는 백척간두에 서서 ‘살아도 죽은 비굴한 삶’을 박차고 자신을 던져 새로운 검찰,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이가 정녕 없는 것일까.

  

조현 종교명상전문기자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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