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2주기 맞아 권정생 생가 휴심여행
‘강아지똥’ 되어 피워낸 ‘민들레 향기’로 부활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막걸리 한 사발 ‘캬~’
‘발 없는 향기가 천 리를 가고, 천년을 남는다’는 말은 권정생을 두고 한 말일까. 평생 병고에 시달리며 시골 교회 종지기와 이웃집 할아버지로 살아간 동화작가 권정생은 살아서보다 오히려 죽은 이후 더 진한 향기를 풍기고 있다. <한겨레>에 연재한 기독교의 숨은 영성가 25명의 삶을 조명해 펴낸 <울림>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그 울림의 영성가를 찾아, 그의 2주기를 며칠 앞둔 지난 9일 <한겨레>독자 40여명과 함께 ‘휴심여행’을 떠났다.
가난하고 소외 받고 아픈 이들이 듣는다며 언손으로 종 쳐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천년간 마을을 지켜온 삼국시대의 불탑이 서 있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서 교회 종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권정생이 1968년부터 82년까지 15년간 교회 종지기로 살았던 일직교회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7년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권정생은 해방 직후 부모의 손을 잡고 귀국했지만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나무장수, 고구마장수로 나섰다가 폐결핵에 걸려 신장과 방광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은 그는 평생 오줌 주머니를 찬 채 독신으로 살다 갔다.
작은 교회 종탑 옆엔 컨테이너상자 건물이 있다.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을 탄 <강아지 똥>을 비롯한 <하느님의 눈물>,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도토리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우리들의 하느님> 등 기독교적 영성 세계를 동화 속에 녹여낸 ‘권정생 동화’의 산실이다. 교회 종탑 아래 나무푯말이 달려있다.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가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 -권정생’
권정생이 한 말을 이 교회 이창식(55) 목사가 써 걸어둔 것이다. 권정생은 그처럼 소외되고 아픈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한겨울에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새벽 한기를 맞으며 종을 울렸다고 한다. 이 목사는 권정생의 말년에 이 교회에 부임해서 4년간 이 마을에서 권정생과 함께 살았다고 했다. 폐결핵은 타인에게 전염될 수 있기에 권정생은 자기 쪽에서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이 목사는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이 교회 종탑 옆 그의 골방에 들어가 스스럼없이 함께 어울리고, 마을 청년들이 함께 잠을 자곤 했다”고 전했다. 폐결핵에 전염될지도 모르는 두려움조차 무장해제시킬 만큼 권정생에겐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권정생은 작가라기보다는 수도자로 산 사람이었다”며 “중병에 걸리면 그것에 짓눌려 살기 마련인데, 권정생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함을 누렸다”고 했다.
추위 피해 이불 밑으로 들어오는 생쥐들까지 한식구로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마을 골목 돌담길을 돌자 마을 끝에 권정생이 말년 20여 년을 보낸 집이 숨어있다. 그를 존경하는 후배작가들이 말끔히 청소해 놓긴 했지만 그야말로 오래전 산골에서나 볼 법한 흙으로 지은 오두막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였기에 얼마든지 간호사들의 간호를 받으면서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그는 “내 몫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라면서 한 달에 5만원 이상을 쓰지 않은 채 가난하게 살다가 10억원이 넘는 인세를 굶주리는 북녘의 어린이들에게 보내줄 것을 유언하고 떠났다.
권정생은 이 오두막에서 손수 밥을 해먹으면서 강아지와 닭과 민들레꽃과 나무들과 어울려 살면서 한겨울 추위를 피해 자신의 이불 밑으로 들어오는 생쥐들까지 내치지 않으며 한식구로 받아들이고 살아갔다. 몸 상태가 좋을 때가 쌀 두 가마니를 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평소엔 늘 병고 속에 신음하면서도 그는 <강아지 똥>과 <몽실언니> 등을 통해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의 아픈 가슴을 보듬어주고 희망의 빛을 전해주었다.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동식물까지도 하늘처럼 경애했던 권정생의 오두막에서 순례단들은 할 말을 잃고,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회사가 어려워 1주일 전 휴직을 했다는 한 여성은 “자신의 모습에 대한 비탄에서 벗어나 민들레꽃을 활짝 피워낸 강아지똥처럼 다시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또 순례단 중 천순자(64)씨는 “물질이 만능이 된 시대에 물질이 아닌 다른 가치로서 살아간 그의 삶이 눈물겹다”면서 “그러나 그는 물질 위주의 삶보다 더 마음이 편하고 행복했기에 그런 삶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했다.
권정생은 너무도 소박했기에 마을 사람들은 권정생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이 마을 앞에서 순례단과 만난 마금학(74)할머니는 “그 양반은 고무신 신고 추리닝 입고 망태기를 들고 다녔고, 우리 집 재봉틀이 고장 나면 와서 고쳐주고 이웃들을 잘 도와줘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좋아했지만,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는 장례식 때 몰려온 사람들을 보고서야 알았다”고 했다. 들에 지천으로 널린 민들레꽃을 약재로 팔기 위해 캐오던 한 할머니는 권정생에 대해 “그 양반 참 좋은 사람이지유, 근데 우리는 그 양반이 그렇게 도시 사람들이 다 아는 사람인지 몰랐다”고 했다.
그가 원하는 그런 교회, 하늘나라에서는 까치네집일까?
순례단은 권정생이 세상을 뜨기 몇달 전 그와 기자와 이현주 목사 등이 모여 묵상했던 마을 어귀 정자나무 아래로 향해 이 마을의 영성과 하나가 되는 묵상을 했다. 권정생이 보낸 마을은 우리나라의 모든 종교가 함께하고 있었다.
권정생이 종지기로 보낸 일직교회 말고도 조탑리라는 지명은 삼국시대 때부터 이 마을을 지켜온 불탑에서 유래했다. 또 마을 꼭대기엔 유교적 사당이 자리잡고 있었고, 마을버스정류장 옆엔 지금은 퇴락했지만 무당이 굿을 했을 법한 서낭당이 서 있었다.
권정생은 기독교적 영성을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가장 많이 심어준 동화작가였지만, 지구상 폭력의 역사의 상당수가 하나님과 예수를 앞세워 저질러진 것에 분개했다. 그는 이 땅 위의 우상과 마귀는 마을 앞 서낭당이나 성주단지와 고시레와 까치밥이나 차례상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전쟁과 핵무기와 독재와 폭력과 자기밖에 모르는 욕망이며 독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런 교회를 원한다고 했다. 권정생은 그런 아름다운 교회를 하늘나라에서 만들었을까.
“00교회라는 간판도 안 붙이고 꼭 무슨 이름이 필요하다면 까치네집이라든가 심청이네집이라든가 망이네집 같은 걸로 하면 되겠지. 함께 모여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성경책 얘기도 하고, 가끔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들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서당 훈장님 같은 분께 공자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옷날이나 풋굿 같은 날엔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궂은 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갖고 싶어.”
안동/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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