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을 향한 기나긴 추모행렬은 19일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독립지도자나 전쟁영웅이나 대중 스타가 아니었다. 수많은 종교지도자 중 한명일 뿐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자주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종종 화를 낼만큼 보통의 한 인간이었고, 말년엔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고, 상당한 친여적 경향성을 자주 드러내 진보진영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추모 대열엔 보수와 진보, 종교간 벽을 넘어 많은 국민들이 함께 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추모 열기가 뜨거워지는 양상이다. 가히 ‘김수환 신드롬’으로 불릴 만하다. 전쟁영웅이나 대중스타가 아닌, 종교지도자에게 이념과 계층, 종교의 벽을 넘어 수많은 국민이 이처럼 남다른 추모의 마음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뭘까? 많은 국민들이 그에게 남다른 친밀감을 느낀 것은 무엇 때문일까.
김 추기경은 종교지도자들의 성역과도 같은 ‘권위’속에 갇혀있지 았았다. 그는 신자와 대중들에게 방문을 열었고, 유머를 잃지않았다. 개인적으로 혹은 강론을 통해 그와 만난 사람들은 비범하기보다는 평범한 얼굴과 말투에 거리감을 허물었다.
그런 평범함 속에서 드러나지않게 빛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현장감각’이었다. 그는 시점과 장소에 따라 ‘가장 적절한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런 센스가 결국 시대를 바꿔놓았고, 답답한 사람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뚫어주었다.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던 시점인 1981년초부터 1년여간 김 추기경의 비서실장을 했던 허근 신부는 “김 추기경은 무엇보다 ‘경청’을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상당수 신부나 목사들이 외부에 강론이나 설교를 할 때는 성경구절만을 준비해가기 나름인데, 김 추기경은 빈민촌이든 교도소든 어디를 가든간에 가기 전에 그곳 사람들을 미리 불러 ‘문제나바램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들은 뒤 가장 필요한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처럼 귀가 컸기에 대부분의 종교지도자와 달리 일방통행이 아닌 대중들과의 쌍방통행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5·18 주모자로 사형선고와 무기징역 선고를 받은 이들의 구명을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탄원해 감형을 받도록 한 행동도 어떤 소신이나 용기에서 비롯됐다기 보다 피해자 가족들의 하소연을 깊게 경청해 내용을 잘 알기에 그렇게 하지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 추기경이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동향으로 주변에 친박정희 인사가 주류를 이루었고, 가톨릭도 보수성이 두드려졌음에도 개인의 평소의 성향이나 주위의 시선과 달리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낸 것도 그가 아무도 의지할 데 없거나 남들이 외면하는 인권 피해자들과 사형수 등에게도 귀를 열어놓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행동이었다.
또한 김 추기경의 남다른 인간미 외에도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암담하기만 현실에 대한 대중들의 막막함이 발길을 명동성당으로 돌리고 있게 하고 있다는 관측도 많다. 조비오 신부와 강신석 목사 등 5·18관계자들과 함께 명동성당을 찾은 박석무 전 5·18기념재단이사장은 “요즘 어려운 시절에 ‘저런 분이 더 있어주어야 하는데…’라는 아쉬움과 기댈 데 없는 암울함이 추모열기를 더욱 더 고조시키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제위기로 삶이 어려워진데다가 신자유주의,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강력한 돈의 위세에 짓눌려 있던 사람들이 김 추기경에게서 돈 이전에 정신이나 도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낸 것”이라며 “김 추기경의 선종이 그런 것에 대한 잠재돼 있던 그리움을 밖으로 표출시켰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교수도 “이명박 정부 들어 경제 살리기도 안 되고, 용산 철거민 참사에서 드러난 사회 양극화의 현실과 약자 무시 정책에 대한 불만이 이웃을 사랑하라며 나눔을 실천했던 김 추기경에 대한 추모로 분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추모객들의 입에서 나오는 김 추기경을 향한 극도의 칭송과 찬사들은 반대로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시절이 그만큼 희망이 없고 살기 팍팍하다는 호소라는 것이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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