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산책] 방생에 앞서 생명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개발보다 자살의 길을 선택하겠다는 우와족
최근 몇년 동안 들은 것 가운데 가장 가슴에 남은 얘기가 있다. 아마존 열대 우림 속에서 살아가는 우와족 얘기다.
우와족은 안데스 산맥 깊은 곳 코바리아 강 근처 숲에서 살아왔다. ‘우와’라는 말은 ‘명상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들은 명상과 노래와 인디언 의식을 통해 고유한 영성을 유지하고 있다. 우와 족은 여름 한철 모든 부족원이 함께 단식을 한다. 열대 우림에 불을 질러 논밭을 만든다면 얼마든지 풍부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지만, 우와족들은 열대우림은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열대 우림 속엔 인간보다 수억만배나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자신만을 위해 그곳에 불을 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생산한 적은 양으로 1년을 버티기 위해서 여름 한 철엔 모든 부족원들이 함께 굶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여름 우기 동안 단식은 모든 생명과 함께 하려는 마음의 표현이자, 가난과 겸양 속에서 자신의 영성을 고양시키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다른 생명들과 수천년동안 평화롭게 살아온 우와족들이 최대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미국의 세계적 기업인 석유개발회사가 우와족이 살아가는 아마존 일대의 개발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석유를 캐내기 위해 그 일대를 송두리채 불태워 모조리 파헤치게 될 경우 우와족의 삶의 터전은 지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자본을 무기로 한 다국적 기업의 공세에 맞설 힘이 우와족에겐 없다. 우와족은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적으로 삼거나 죽이기를 원치않는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죽는 길을 택하겠다고 했다. 만약 석유개발회사가 아마존 일대를 모조리 파헤칠 경우 우와족은 삶을 유지해가기 어렵기 때문에 모든 부족이 자살하는 길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은 뒤 5~6년 동안 우와족의 정황을 더 이상 들을 기회는 없었다. 다만 2005년쯤 아마존 밀림을 베어내려는 기업을 앞세운 벌목꾼들을 막아내며 환경운동을 해온 노트르담 수녀회의 도로시 스탱 수녀가 아마존 파괴자들이 보낸 살인 청부 업자들에 의해 총을 맞고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거대한 욕망과 자본의 세력들은 자신의 방해물들을 하나둘씩 제거해가면서 ‘개발’과 ‘성장’, ‘편리’라는 명분으로 아마존을 베고 불태우고 파헤치고 있다. 따라서 지구인들이 숨을 쉴 수 있는 산소 중 상당 부분을 공급해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아마존 열대우림의 1,500만 헥타르가 사라져버렸다. 이로 인해 아마존의 물 가운데 4분의 3은 비가 되지 못한 채 대서양으로 그냥 흘러들어가고 있다. 순환의 질서가 깨짐으로써 생명으로서 온전한 기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사를 앞세운 유럽인들의 이중성
전세계의 개발을 주도하고 미국의 대통령을 만들어내며 천문학적인 전투기와 군사무기의 판매로 엄청난 이익을 챙기는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은 다양한 인도주의적 사업과 장학 사업을 동시에 벌인다. 의약품이 없어 죽어가는 후진국의 병자들을 위해 병원도 짓고 의약품을 보내주며,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빵을 공급해주기도 한다. 그들이야말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며, 최대의 방생 공덕을 쌓고 있는 것인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400여년전 이래 선교사들과 청교도를 비롯한 구라파인들은 북중남미 대륙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1억명 가까운 원주민들을 짐승처럼 살육했고, 수천 수만년 동안 지속되어온 원시 공동체를 파괴해 복원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완전한 파괴 위에 구라파인들이 세운 미국 등의 아메리카의 정부들은 쫓기고 쫓겨 갈 곳 없는 인디언들을 위해 인디언보호구역을 만들고 박물관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방생의 공덕을 쌓고 있는 것인가.
원래 자신들의 땅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만은 아니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 선교사를 앞세운 인간 사냥꾼들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동물 사냥하듯 인간들을 사냥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고가 노예로 사용했다. 이렇게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간 아프리카 흑인이 1천만명에서 1천5백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때 유럽 못지않은 독자 문명을 구축했던 1억명의 아프리카 대륙 흑인들 가운데 5천만명이 죽거나 노예로 붙들렸다. 그로 인해 평화롭던 아프리카는 서구 사회 사람들이 비만을 어쩌지 못해 골치를 앓고 잇는 동시대에 빵 한 조각과 마실 물 한 모금조차 없어 죽어가고, 에이즈 등 병이 창궐하고 분쟁이 끊이지 않는 저주의 땅이 되었다.
타인의 희생 위에 세운 공덕의 덧없음
얼마전 세계 1,2위 부자인 미국 마이크로 소프트사 회장 빌 게이츠와 주식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이 37조원과 35조원씩을 공익재단에 기부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했다. 감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돈의 백배, 천배, 만배가 쏟아부어진다 하더라도 저주 받은 아프리카 땅을 복원하기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지상에서 왕과 귀족, 부자 등 가진자들이 주도한 방생과 구제의 공덕은 대부분 타인과 다른 생명의 희생 위에 세운 부와 성공과 영광의 한 귀퉁이를 잘라 빈자들에게 던져줌으로써 그 때까지 자신의 죄과를 신으로부터 용서 받고 은혜 받기 위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지구와 생명의 역사에 대한 성찰이 없이 오직 방생과 공덕의 결과만을 논한다면 성한 제비를 잡아다 일부러 다리를 부러뜨린 뒤 상처를 동여매주어 치료해주는 놀부의 공덕을 칭송하는 필연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발견해야 할 것은 누군가를 도와주고 베풀 수 있는 발전과 부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분명한 통찰이다. 지난 100여년 동안 인류는 놀라운 부를 이뤄 풍요로워졌다.
19세기 이래 세계 인구는 여섯 배로 증가했다. 그런데 에너지 수요는 무려 80배나 증가했다. 그 에너지의 대부분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사용하고 있다. 세계 인구의 20퍼센트도 안 되는 선진국 사람들이 세계 에너지의 80퍼센트를 쓰고 있다. 이에따라 화석 에너지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처럼 에너지를 소비한다면 앞으로 40년 뒤 석유가 바닥나고, 대부분의 에너지가 고갈될 날도 멀지 않다. 우리가 짧은 시간에 쌓은 부는 우리들 뿐 아니라 후진국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도 대대손손 사용해야 할 것을 송두리째 소모해버림으로써 얻은 것들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지만, 자원은 유한하다. 한 마을 사람들이 세세생생 사용해야 할 석유가 100드럼인데, 10년만에 이것을 다 사용해버리면 남은 생애와 후손들이 사용할 기름이 전무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또 10명이 사는 집에 먹을 빵이 10개뿐인데 한두 사람이 7~8개의 빵을 먹는다면 대부분은 굶을 수밖에 없는 것도 분명한 일이다.
만약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미국 등 선진국의 부자들 15명은 비만이지만 12명은 굶어 죽어가고 있다. 지구인 100명 가운데 무려 70명은 영양 부족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미국은 가난한 나라의 굶주리는 이들에게 가야 할 식량의 대부분을 육식을 위한 가축용 사료로 사용하고, 더구나 곡식값 하락을 막기 위해 곡창지대의 엄청난 밀밭을 불질러버리기도 한다.
강 죽인 뒤 물고기 몇마리 놓아주는 퍼포먼스 언제까지
인도인들이 연간 200킬로그램의 곡물을 소비하는 데 비해 미국인들은 무려 800킬로그램의 곡물을 소비한다. 모두 미국처럼 살기를 열망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현재 지구 인구 65억 가운데 미국처럼 곡물을 소비하는 이들이 25억 명만 되어도 나머지 40억 명은 그 자리에서 모두 굶어 죽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쌓은 부와 성장은 자원을 덜 소비하고, 덜 먹어주고 가난하게 산 빈자들과 뭇생명들의 희생 위에서 이뤄지고 있는 명백한 증거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방생이나 선행, 보시가 아니라 빈자들과 모든 생명들의 공덕에 대해 감사하며 그들에게 사과하며 되돌려주는 마음이다.
오직 나 자신, 우리들만을 위한 개발 야욕은 수십억년을 이어온 한반도의 자연환경을 거대하게 개발하는 경부대운하 추진에 이르렀다. 한반도의 모든 강을 죽인 뒤 청계천같은 인공천을 만들어 물고기 몇마리를 방생하는 퍼포먼스를 언제까지 계속하자는 것인가.
새 한마리를 놓아주는 방생보다 아마존의 숲이 바로 내가 마시는 산소라는 엄연한 사실, 물고기 한 마리를 놓아주는 방생보다 한강과 낙동강의 물이 오늘 내가 마시는 생명수라는 사실, 산과 강이 죽으면 새와 물고기도 죽고, 나도 살 수 없다는 엄연한 깨달음이 더욱 더 절실한 시간이다.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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