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복싱·격투기 링 달구는 전석민·전현식씨
‘땡’하고 공이 울린 뒤 혈전을 벌이던 두 복서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코너로 돌아오면 그들의 시간이 시작된다. 1분간 흥겨운 음악에 맞춰 링 위에서 온 몸을 흔들어댄다. 때로는 ‘섹시’하게, 때로는 흥겹게…. 모두의 시선이 느껴진다. 또 다시 ‘땡’ 소리가 울리기 전에 얼른 링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두 손에 들고 있던 판대기의 숫자를 바꾸며 다음의 음악과 율동을 생각한다.
링 위의 두 선수는 여자 복서들이다. ‘땡’ 소리가 나면 다시 링 위로 씩씩하게 뛰어 들어가는 이들는 남자이다. ‘라운드 맨’.
12일 성남 서울보건대 체육관에서 열린 세 체급의 국제여자복싱협회(IFABA) 세계챔피언 결정전에서 쉬는 시간마다 경기 분위기를 살린 ‘라운드 맨’ 전석민(27·사진 왼쪽), 전현식(25)씨. 두 남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존재하는 라운드 맨이라는 자부심으로 링에 오른다.
2003년 12월 당시 세계챔피언이었던 이인영의 방어전을 앞두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개 선발된 라운드 맨 6명 중 4명은 그만뒀고, 지금은 이 두 남자만 링에 오른다. 4명이 그만둔 이유는 단순하다. 벌이가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라운드 맨을 하고 받는 돈은 20만원. 10만원씩 나눠 가진다. 그동안 3차례의 여자 복싱 세계타이틀전과 10여차례의 이종격투기 경기에 나섰다.
물론 두 사람의 직업은 따로 있다. 한때 방송사 공채 탤런트에 합격해 단역만 맡다가 대학 졸업 뒤 광고기획사에서 일하고 있는 전석민씨는 타고난 끼를 주체하기 힘들어 라운드 맨을 계속한다. 스포츠센터에서 몸 관리를 도와주는 ‘근육 맨’ 전현식씨는 라운드 판을 들고 웃통을 벗어 던지는 야한 동작도 한다. 그럴 때마다 여성 관중들은 손뼉을 치며 흥을 돋군다.
연습은 새벽에 만나서 한다. 매니저도 없다. 스스로 음악도 고르고, 그 음악에 맞는 춤도 개발한다. ‘라운드 걸’들은 라운드 판을 들고 링 위를 ‘우아하게’ 걸으면 되지만, ‘라운드 맨’들은 뭔가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라운드마다 다른 음악과 춤으로 승부한다. 의상도 스스로 마련한다. 때로는 보디가드처럼 정장을 하기도 하고, 헐렁한 군복 바지를 입기도 한다.
전석민씨는 “본업과는 전혀 다른 이중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짜릿한 즐거움이 있다”며 “수입보다는 새로운 길을 닦아 나간다는 사명감으로 링 위에 오른다”고 말했다. 전현식씨는 “여성 스포츠가 활성화되는 것이 여성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길”이라며 “좀더 많은 여성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길 바란다”고 말했다.
성남/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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