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로드FC 영건즈 31에서 승리한 박대성이 로드걸 최설화의 허리를 껴안아 ‘성추행 논란’에 휩싸였다. 엠비시스포츠플러스 영상 갈무리
지난 10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로드FC 영건즈 31’ 라이트급에 출전한 선수 박대성씨의 승리 세리머니가 성추행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이날 영건즈 경기에서 김경표 선수와 맞붙은 박대성씨는 5분 2라운드 경기 끝에 스플릿 판정승을 거뒀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습니다. 신승의 기쁨을 표현하던 박대성씨가 기념사진 촬영을 위해 가까이 선 로드FC 라운드 걸(로드 걸) 최설화씨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최씨는 당황한 듯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박씨를 살짝 밀쳐냈습니다.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겁니다. 하지만 문제 행동은 반복됩니다. 뒤돌아서 관객석에 인사를 할 때도 박씨는 자신의 어깨를 밀어내고 있는 최씨의 허리를 다시 한 번 끌어안았습니다. 경기를 중계하던 캐스터와 해설가도 이 장면을 보고 “큰일 나는데”, “이러면 안 됩니다”라고 지적합니다.
이날은 ‘2016 머슬 마니아’에서 3관왕을 한 모델 최설화씨가 로드 걸로 데뷔하는 날이었습니다. 최씨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몸이 안 좋은 상태라 걱정됐지만 즐겁게 끝났습니다. 로드 걸로 활동하는 분들 대단하신 것 같아요. 하지만 승리에 대한 표현도 좋지만 온종일 고생하시는 로드 걸분들을 배려해주셨으면 더 진정한 챔피언이 되셨을 것 같아요”라며 조심스레 불편함을 내비쳤습니다. 최씨가 올린 게시물에는 박씨의 성추행을 비판하는 댓글과 함께 최씨를 응원하는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최씨의 태도를 비판하는 댓글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허리를 안는 포즈는 다른 이종격투기 경기의 세리머니에서도 다반사인데 최씨가 ‘프로답지 못하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최설화씨는 로드 걸로서 ‘프로 의식’이 부족했던 걸까요?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거절 의사에도 반복적 행동이 문제
당시 상황은 분명히 박씨의 잘못입니다. 최씨가 일차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했는데도 박씨가 반복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박씨의 행동에 최씨는 당황하면서도 분명히 상대를 밀쳐냈습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에 도취해 있던 박씨는 이 행동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합니다. 성추행은 피해자의 ‘성적 수치심’이 판단 기준이 됩니다. 격투기 선수와 로드 걸의 기념사진 촬영 때 스킨십이 일반적이라고 하더라도, 해당 행동이 강압적으로 느껴지거나 성적 수치심을 유발해 당사자가 거절 의사를 밝혔다면 반복된 행동은 분명히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날 기념 촬영 때 박대성씨의 모습을 보면 다소 정신이 없는 듯 보입니다. 1차 사진촬영을 마치고 상황이 종료되지 않았는데도 자리를 벗어나려는 것을 최씨와 관계자들이 안내해 다시 2차 사진촬영에 임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박씨의 행동에 다른 의도가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격투기 선수로서, 함께 현장에서 일하는 로드 걸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당사자 간의 문제는 지난 12일 박대성씨가 최설화씨를 직접 찾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일단락됐습니다. 최씨는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을 올리며 “경기 뒤 쉴 사이도 없이 마음 고생하셔서 그런지 얼굴이 안 좋아 보이시더군요. 직접 뵈니 굉장히 착하고 순박해 보이셨어요”라고 덧붙였다. 박씨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바로 가기)에서 “(우승 후) 기분이 너무 좋았고 업 돼서인지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며 자신의 행동이 실수였음을 인정했습니다.
성추행 논란에 대해 의견을 밝힌 로드걸 최설화의 인스타그램.
로드 걸도 격투기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최씨를 대하는 일부 누리꾼들의 반응에 있었습니다. 최씨가 박씨와 찍은 사진을 올린 게시물에서도 일부 누리꾼들은 최씨를 비판했습니다. “난 너그러운 사람이다 광고하는 것이냐”, “라운드 걸이 원래 선수들과 스킨십하며 사진 찍는 게 일인데 그런 일인지도 모르고 성추행이라고 하면 일을 관둬라”는 누리꾼의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반응은 사실 처음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지난해 9월 있었던 프로야구 프로농구 치어리더 박기량씨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입니다. KT 소속 야구선수 장성우씨가 박씨에 대해 했던 성적 발언이 있었고, 박씨가 이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으로 법적 대응을 했지만, 일부 누리꾼들은 치어리더를 마음대로 희롱해도 괜찮은 존재 정도로 거론하며 박씨의 법적 대응을 비판했습니다. 박씨가 야구장에서 대놓고 성희롱을 당한 경험, 기업 간부가 “술 따라 보라”고 말했다는 경험 등이 회자되면서 박씨의 대응에 응원하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이 비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성이 짧은 옷을 입고 춤을 춘다는 이유로 ‘쉬운 대상’으로 보고 마음대로 해도 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박씨는 이에 “용서를 하고 싶지도,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다. 허무맹랑한 내용에 여성으로서 수치스럽지만,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야구장에는 치어리더와 리포터, 배트 걸 등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있다. 모두들 야구를 사랑하며 가슴속에 ‘야구인’이라는 단어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다. 나 혼자 용서를 해버리면, 그들 전체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만들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단호한 대응을 해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설화씨의 SNS에서도 “맨날 반은 벗고 다니면서 허리 만지는 남자를 변태로 모는 것은 이중적”이란 의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치어리더이자 피트니스 선수인 배수현씨는 “저희는 스포츠의 상징일 뿐 노출을 해서 상품화시키는 사람은 아니다. 스포츠의 경우 활동적이고 활발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야구복을 입고 응원하는 것이다. 팔을 쭉쭉 뻗고 방방 뛰는 동작을 해야 하는데 한복 입고 제대로 동작이 될 리가 없다”고 반박합니다. (▶바로 가기)
라운드 걸은 트로피가 아니다
팝아티스트 낸시랭은 2011년 12월 3일 로드FC 5에 로드 걸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전날 참가 선수들의 계체 행사 때 비키니 차림을 했던 것과 달리 본 경기에서 그가 택한 의상은 턱시도였습니다. 그는 “라운드 걸은 그저 노출이 기본이고 과도한 노출을 통해서만 주목받을 수 있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바로 가기) 낸시랭은 이어 “중계방송을 볼 땐 몰랐는데 경기장에서 직접 보니 선수들은 한 경기를 끝내고 내려가지만 라운드 걸은 수십번을 링에 오르내린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내가 욕을 먹으면서라도 부각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라운드 걸의 주된 역할은 종합 격투기나 복싱, 킥복싱 등의 격투기 대회에서 경기의 중간에 링 위에 올라 라운드 회수를 알려주고 대회를 홍보하는 일입니다. 라운드 걸이 처음 등장한 시기에는 정장 차림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좀 더 움직이기 간편하고 스포티한 의상들로 바뀌었습니다. 이종격투기 UFC의 라운드 걸인 ‘옥타곤 걸’들은 특히 하이힐을 신지 않고 운동화를 신기도 합니다.
‘성추행 경기’와 같은 날 열린 로드FC 35는 배우 김보성씨가 선수로 출전해 대전료 전액을 소아암 환자들에게 기부하는 소식이 알려져 화제를 모았습니다. 최설화씨도 개런티 전액을 소아암 환자의 치료비에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로드FC는 이번 대회를 ‘사랑 나눔 프로젝트’의 하나로 마련하고 김보성씨와 최설화씨의 데뷔를 기획했습니다. 거칠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상쇄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는 의도치 않은 논란으로 조금 빛이 바랬습니다.
다시 한 번 영상을 돌려봅니다. 1차 성추행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환하게 웃으며 경기를 마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박대성씨를 이끌고 다시 사진을 찍자고 선 최설화씨는 과연 스페셜 로드 걸로서 프로답지 못했던 걸까요.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