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과 대표팀서 한솥밥 먹은 한국 사브르 여왕들
이라진, 발목 늘 잡았던 ‘장벽’ 김지연 결국 넘어서
이라진, 발목 늘 잡았던 ‘장벽’ 김지연 결국 넘어서
‘절친’ 두 선수가 있다. 김지연(26·익산시청)과 이라진(24·인천중구청). 이들은 부산디자인고교 1년 선후배다. 학창시절과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한국 펜싱 여자 사브르를 세계 정상권에 올려 놓은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김지연은 이라진에게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그는 국제대회 개인전에서 이라진의 발목을 잡곤 했다. 지난해와 올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이라진은 결승과 준결승에서 김지연에게 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라진은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마침내 김지연을 넘고야 말았다.
20일 경기도 고양체육관은 한국 펜싱의 날이었다. 여자 사브르와 남자 에페 개인전에서 금·은메달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선수가 결승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건 이미 예측된 상황이었다. 누가 주인공이 돼 금메달을 가져갈지에 더 관심이 쏠렸다. 여자 사브르에서 먼저 희비가 엇갈렸다.
준결승전을 앞두고 선수들을 소개하는 자리에 나란히 선 이라진과 김지연은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며 중국 선수와 맞붙을 서로의 긴장을 풀어주고 격려했다. 그리고 모두 승리했다. 세계랭킹 12위 이라진은 자신보다 랭킹이 12계단이나 낮은 리페이를 15-7로 가볍게 이겼다. 반면 세계랭킹 6위 김지연은 8위 셴첸과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접전 끝에 15-11로 힘겨운 승리를 거뒀다. 시종일관 빠른 발놀림을 보인 그는 경기에선 이겼지만 많은 땀을 흘리며 체력이 달리는 모습을 보였다.
결승전을 앞두고 피스트에 오른 두 선수는 웃으며 장난을 치는 정겨운 모습도 보였다. 관중들이 숨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시작된 경기는 속전속결이었다. 절친에 대한 매너였을까. 준결승에서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이며 저돌적인 공격을 하던 이라진은 큰 몸짓 없이 칼끝에만 집중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빠른 발을 자랑하던 김지연도 피스트 위를 휘젓는 현란한 발놀림 대신 단조로운 전법으로 대응했다. 두 선수가 서로를 잘 아는 만큼 다양한 작전과 신경전을 구사하기보다 정공법을 택한 듯했다.
선취점을 얻으며 앞서나간 이라진은 별다른 반전 없이 김지연에 15-11로 승리했다. 그 동안 수차례 그의 앞을 막아섰던 장벽을 무너뜨린 경기치고는 예상밖으로 싱겨운 결과였다. 김지연은 준결승 때처럼 힘든 모습을 보이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피스트 위에 쭈그려 앉아 휴식을 취하곤 했다. 준결승에서 중국의 셴첸과 혈투를 벌인 것이 큰 부담이 된 듯했다. 경기 막판 이라진의 허를 찌르는 재치있는 공격을 하기도 했지만 승부를 뒤집지는 못했다. 경기가 끝난 뒤 이라진은 환호하지 않고 담담한 모습을 보였고, 김지연은 겸연쩍은 미소로 패배를 인정했다.
이라진은 믹스트존 인터뷰에서 “메이저대회에서 지연 언니를 이긴 게 처음이다. 언니와 결승에 올라 대결하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이뤄졌다. 경기에서도 승리해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그는 땀과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손으로 닦은 뒤 “감격의 눈물”이라며 웃었다. 경기 후반 13-6에서 4점을 내리 내줬을 때 “언니가 실력이 워낙 좋아 솔직히 초조했다”고 속내를 밝히기도 했다.
이라진과 김지연은 승부가 확정되는 순간 아무 말 없이 ‘수고했다’는 눈빛만 주고 받았다고 했다. 김지연은 “아쉽게 졌지만 한국 선수가 1등을 했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패배의 원인이 체력 부족이었다”고 인정하며 단체전에선 이라진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고 다짐했다.
남자 에페의 주인공은 정진선(30·화성시청)이었다. 런던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그는 준결승에서 싱가포르의 림웨이웬(29)을 15-6으로 가볍게 꺾은 뒤 결승에선 박경두(30·해남군청)에게 15-9 승리를 거두며 금메달을 따냈다.
고양/이재만 기자 appletr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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