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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마음으로 달린다

등록 2014-05-01 19:15수정 2014-05-01 21:15

국내 최고령 여자 기수 이금주가 경기도 과천 렛츠런파크(옛 경마공원)에 있는 마방에서 말을 쓰다듬고 있다. 한국마사회 제공
국내 최고령 여자 기수 이금주가 경기도 과천 렛츠런파크(옛 경마공원)에 있는 마방에서 말을 쓰다듬고 있다. 한국마사회 제공
‘여자 기수 1호’ 왕언니 이금주씨
아버지 도장 훔쳐…2001년 첫출전
출산때 빼고 계속 타 잦은 부상
“엄마 자랑스럽다” 말에 힘 얻어

난폭했던 말에 “애기야” 부르며
매일 안아주고 뽀뽀하며 조련
최근 여성기수 첫 국제대회 우승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결승선을 1위로 통과해서가 아니었다. ‘파워시티’는 경주 내내 어깨(앞다리)를 잘 디디지 못했다. 만약 다리가 부러졌다면, 경주마로서의 생명은 끝이었다. “골절이 아니다”라는 검진 결과를 듣고서야 이금주(38) 기수는 비로소 안도했다. ‘엄마’의 마음이었다. “사람을 싫어하고 난폭해서 다른 기수들은 다 포기했는데 3개월 동안 매일같이 당근 주고 안아주고 뽀뽀해주니까 마음을 열어줬어요. 이젠 ‘애기야~’ 부르면 저를 쳐다보고, 입술을 내밀면 뽀뽀도 해줘요. 지금 두 달 동안 장기휴양 가 있는데 월요일마다 찾아가 안아주고 있어요.”

이신영, 이애리 등과 함께 금녀의 영역을 허물며 여자 기수 1호로 처음 경주로에 선 때가 2001년 7월이었다. 부모 동의가 필요한 서류에 아버지 도장을 몰래 훔쳐 찍어서 기수 후보생이 되고, 1주일에 휴가는 딱 한 번인 군대식 합숙생활을 2년 동안 견딘 뒤였다. “마방에 여자가 출입하면 재수없다고 소금을 뿌리고, ‘여자가 무슨 말을 타냐’며 꺼리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 이금주 기수는 “예전에는 거친 분위기였는데 여자 기수가 들어오니 언어도 순화됐고, 성적도 잘 나니까 여자 기수가 말에 올라타는 횟수도 늘었다. 남자 기수는 파워가 있는 반면 여자 기수는 유연성과 섬세함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 전국적으로 여자 기수는 이금주 기수를 포함해 10명이다. 그는 최고령 여자 기수다.

최근 모로코에서 열린 국제 여성기수 초청경주에서 이 기수는 미국·독일·프랑스 등지에서 온 기수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국내 여자 기수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파워시티’를 타고 2전2승(두 번 타고 두 번 모두 우승)을 거둔 뒤 이룬 성과이기도 했다. “18시간 비행기를 타고 간 뒤 시차 때문에 거의 잠을 못 잔 상태로 말을 탔어요. 처음 타보는 아랍 말에 10분 만에 적응하고 경주에 임했는데 결승선에 들어온 다음 말이 휙 돌아서서 반은 옆으로 넘어갔었어요. 1등으로 들어왔는데 결승선에서 떨어졌다면 얼마나 창피했을지 지금도 아찔해요.”

사진은 지난달 12일 모로코에서 열린 국제 여성기수 초청경주에서 선두로 달리고 있는 장면. 한국마사회 제공
사진은 지난달 12일 모로코에서 열린 국제 여성기수 초청경주에서 선두로 달리고 있는 장면. 한국마사회 제공
출산으로 인한 2년의 공백기를 제외하고 계속 말을 타면서 부상도 숱하게 당했다. 2005년에는 오른쪽 안구가 함몰되면서 시력을 잃을 뻔했고, 2007년에는 발주대 안에서 말과 함께 뒤집어졌다. 발가락이 부러지는 것은 예삿일이다. “말에 깔린 경험이나 동료의 사고사 때문에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말이 보고 싶고 타고 싶더라고요. 정말 힘들 때는 마방에 가서 엉엉 울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말이 제 얘기를 다 들어주고 있었어요. 제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는 것이죠.”

이 기수는 1주일 내내 바쁘다. 새벽 5시 훈련에 참가해야 하고 개인훈련도 해야 한다. 1주일에 한 차례 성신여대 체육학과에서 승마 강의를 한다. 그는 박사 학위를 받은 어엿한 교수님이다. 사극 배우들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개인 레슨도 따로 한다. 일곱살 아들 (백)승한이와 함께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새벽 5시까지 출근하다 보니 보통 아이가 자고 있을 때 나오고, 늦게 들어가면 아이가 자고 있어요. 좋은 엄마가 아닌데도 아이는 항상 ‘엄마가 자랑스럽다’고 말해줘요.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스럽죠. 만삭일 때도 승마 수업을 하고, 아이 백일 때도 안고서 말을 타서 그런지 승한이는 5살 때 처음 혼자 말을 탔는데 겁이 전혀 없더라고요.”

서른여덟 적지 않은 나이. 그는 언제까지 치열한 승부가 오가는 경주로에 설까. “국제 대회에 나가보니 마흔 살이 넘은 기수들도 많았어요. 말 타고 훈련시키는 것을 즐기면서 하는 게 느껴졌죠. 그들을 보면서 체력이 될 때까지 말을 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싶었어요. 생각의 폭이 넓어진 거죠. 파워시티처럼 애기였을 때 만져서 내 힘으로 우승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드리고 싶어요. 우리 아들이 끝까지 응원해줄 것이라고 믿으니까요.”

과천/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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