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2014] 데뷔에서 피날레까지
* 아디오스 : 스페인어로 '안녕'
김연아(24)가 21일(한국시각) 2014 소치 겨울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프리스케이팅 주제곡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는 탱고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가 아버지를 잃은 직후인 1959년 만든 곡이다.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아버지에게 작별을 고하는 피아졸라의 격정적인 애절함이 그대로 묻어 있다. 이 선율에 맞춰 마지막 연기를 선물한 김연아를 떠나보내는 전세계 팬들의 마음도 애절했을까?
세계를 열광시켰고 세계를 감동시켰던 ‘피겨 여왕’의 몸짓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999년 초등학교 3학년 때 강원도 용평에서 열린 겨울체전 초등부 D조 1등으로 첫 공식 기록을 남긴 이래 벌써 15년이다. 김연아가 있어 행복했던 그 시간을 돌아본다.
■ 감출 수 없었던 재능 1994년 4살(우리 나이 5살)의 김연아는 젊은 시절 피겨를 배웠던 어머니 박미희씨의 권유로 언니 김애라(27)씨와 함께 피겨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가끔씩 빙상장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김연아는 2년 뒤인 1996년 류종현 코치의 눈에 띄었다. 원석을 발굴하는 류 코치의 ‘매의 눈’이 없었다면 김연아는 스케이트를 취미로 하는 평범한 여학생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연아는 류 코치의 가르침을 받으며 잠재돼 있던 스케이팅 본능을 서서히 깨워갔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겨울체전 등 국내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 2002년 4월엔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트리글라브 트로피 노비스 대회(만 13살 이하)에 출전해 1위에 올랐다. 김연아의 첫 세계 제패이면서 동시에 주니어·시니어를 통틀어 한국 피겨가 사상 처음 거둔 우승이었다. 이듬해 중학교 1학년이 된 김연아는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이때부터 태릉선수촌에 들어간다. 김연아는 2010년에 펴낸 책 <김연아의 7분 드라마>에서 “가장 추억이 많으면서도 가장 추억하기 싫은 곳이 태릉 아이스링크”라고 했다.
4살에 시작한 피겨는 그녀의 전부
타고난 재능에 노력하는 자세까지
아직도 깨지지 않은 ‘역대 최고점’
여왕은 건재했고 슬럼프는 짧았다
후회없는 마지막 무대로 고한 ‘안녕’
■ 라이벌 아사다의 등장 어린 김연아 앞에는 ‘필생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24)가 있었다.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난 동갑내기 두 사람은 국제대회에 얼굴을 내보일 때부터 은퇴를 하는 지금까지도 언제나 항상 엮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중학교 2학년 때인 2004년 12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무대였다. 아사다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트리플 악셀(3회전 반 점프)에 성공하며 172.25점이란 높은 점수로 우승을 차지했고, 김연아는 137.75점으로 2위에 올랐다. 무려 34.5점이나 뒤진 결과였다. ‘왜 하필 저 아이가 나랑 같은 시대에 태어났을까.’ 김연아는 삼신할머니의 점지가 얄궂다고 생각했지만 낙담하진 않았다. 강철멘탈을 바탕으로 “남들이 어떻게 보든 내 연기를 하고 싶다”는 뚝심으로 훈련, 또 훈련에 매진했다. 결국 김연아는 2006년 3월 아사다 마오를 처음으로 이겼다.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 177.54점을 기록해 153.35점에 그친 아사다 마오를 무려 24.19점차로 누르고 정상에 오른 것이다. 2008년부터 승부의 추는 김연아로 기운다. 16번 맞대결을 펼쳐 김연아가 10번 이기고 6번 졌다. ■ 우뚝 선 ‘피겨 여왕’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2006~2007 시즌, 여자 피겨 역사상 길이 남을 쇼트프로그램 ‘록산느의 탱고’로 김연아는 돌풍을 일으켰다. 2006년 11월 프랑스에서 열린 4차 그랑프리에서 성인 무대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해 12월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김연아는 고관절과 허리 부상에도 진통제를 맞아가며 연기를 펼치는 투혼 끝에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2009년 3월 미국 엘에이(LA)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 세계대회. 김연아의 프리스케이팅 점수가 발표되는 순간 경기장은 흥분에 휩싸였다. 131.59점. 쇼트프로그램에서 76.12점을 받은 김연아는 총점 207.71점을 기록해 여자 피겨 사상 처음으로 ‘꿈의 점수’인 200점을 처음으로 돌파했다. 그리고 1년 뒤, 김연아는 2010 밴쿠버 올림픽에서 ‘피겨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연기’라는 극찬을 받으며 무려 228.56점(쇼트 78.50, 프리 150.06점)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점수는 아직도 깨지지 않은 피겨 사상 역대 최고점이다. ■ 부상, 긴장감, 목표 상실…그리고 방황 주니어 시절부터 고관절 부상과 허리 통증은 항상 김연아의 발목을 잡았다. 열악한 훈련 환경과 몸에 맞지 않는 스케이트를 신고 맹훈련을 한 탓이었다. 학창 시절 또래들이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고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해야만 했다. 스스로 “은퇴를 한 뒤에는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편하게 하루를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할 정도로 정상에 오르고 그 자리를 지키는 건 힘든 일이었다. 밴쿠버에서 금메달을 따고 뚜렷한 목표를 잃은 김연아는 운동과 은퇴를 놓고 방황했다. 2011~2012 시즌 모스크바 세계대회에만 딱 한번 출전해 2위에 올랐다. ■ 화려한 복귀…영예로운 은퇴 2012년 7월2일 김연아는 돌연 복귀를 선언했다. 밴쿠버 올림픽 뒤 자신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 결별한 김연아는 복귀 뒤 자신의 파트너로 옛 은사인 류종현 코치와 신혜숙 코치를 모셨다. 12월 출전한 엔아르더블유(NRW)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연아는 이어 2013년 3월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피겨 사상 두번째로 높은 점수인 218.34점으로 우승하며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김연아는 “부담감 속에 선수 생활을 접을 수는 없었다. 소치 올림픽 무대에서 은퇴하겠다”며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2010년 이후 오직 4번의 국내·국제 대회에만 출전했던 김연아. 하늘이 내린 피겨의 천재는 약속대로 소치 올림픽에서 최선의 경기력을 보여주며 화려하게 마지막 무대를 마무리했다. 소치/허승 기자 raison@hani.co.kr
4살에 시작한 피겨는 그녀의 전부
타고난 재능에 노력하는 자세까지
아직도 깨지지 않은 ‘역대 최고점’
여왕은 건재했고 슬럼프는 짧았다
후회없는 마지막 무대로 고한 ‘안녕’
■ 라이벌 아사다의 등장 어린 김연아 앞에는 ‘필생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24)가 있었다.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난 동갑내기 두 사람은 국제대회에 얼굴을 내보일 때부터 은퇴를 하는 지금까지도 언제나 항상 엮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중학교 2학년 때인 2004년 12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무대였다. 아사다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트리플 악셀(3회전 반 점프)에 성공하며 172.25점이란 높은 점수로 우승을 차지했고, 김연아는 137.75점으로 2위에 올랐다. 무려 34.5점이나 뒤진 결과였다. ‘왜 하필 저 아이가 나랑 같은 시대에 태어났을까.’ 김연아는 삼신할머니의 점지가 얄궂다고 생각했지만 낙담하진 않았다. 강철멘탈을 바탕으로 “남들이 어떻게 보든 내 연기를 하고 싶다”는 뚝심으로 훈련, 또 훈련에 매진했다. 결국 김연아는 2006년 3월 아사다 마오를 처음으로 이겼다.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 177.54점을 기록해 153.35점에 그친 아사다 마오를 무려 24.19점차로 누르고 정상에 오른 것이다. 2008년부터 승부의 추는 김연아로 기운다. 16번 맞대결을 펼쳐 김연아가 10번 이기고 6번 졌다. ■ 우뚝 선 ‘피겨 여왕’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2006~2007 시즌, 여자 피겨 역사상 길이 남을 쇼트프로그램 ‘록산느의 탱고’로 김연아는 돌풍을 일으켰다. 2006년 11월 프랑스에서 열린 4차 그랑프리에서 성인 무대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해 12월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김연아는 고관절과 허리 부상에도 진통제를 맞아가며 연기를 펼치는 투혼 끝에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2009년 3월 미국 엘에이(LA)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 세계대회. 김연아의 프리스케이팅 점수가 발표되는 순간 경기장은 흥분에 휩싸였다. 131.59점. 쇼트프로그램에서 76.12점을 받은 김연아는 총점 207.71점을 기록해 여자 피겨 사상 처음으로 ‘꿈의 점수’인 200점을 처음으로 돌파했다. 그리고 1년 뒤, 김연아는 2010 밴쿠버 올림픽에서 ‘피겨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연기’라는 극찬을 받으며 무려 228.56점(쇼트 78.50, 프리 150.06점)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점수는 아직도 깨지지 않은 피겨 사상 역대 최고점이다. ■ 부상, 긴장감, 목표 상실…그리고 방황 주니어 시절부터 고관절 부상과 허리 통증은 항상 김연아의 발목을 잡았다. 열악한 훈련 환경과 몸에 맞지 않는 스케이트를 신고 맹훈련을 한 탓이었다. 학창 시절 또래들이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고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해야만 했다. 스스로 “은퇴를 한 뒤에는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편하게 하루를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할 정도로 정상에 오르고 그 자리를 지키는 건 힘든 일이었다. 밴쿠버에서 금메달을 따고 뚜렷한 목표를 잃은 김연아는 운동과 은퇴를 놓고 방황했다. 2011~2012 시즌 모스크바 세계대회에만 딱 한번 출전해 2위에 올랐다. ■ 화려한 복귀…영예로운 은퇴 2012년 7월2일 김연아는 돌연 복귀를 선언했다. 밴쿠버 올림픽 뒤 자신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 결별한 김연아는 복귀 뒤 자신의 파트너로 옛 은사인 류종현 코치와 신혜숙 코치를 모셨다. 12월 출전한 엔아르더블유(NRW)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연아는 이어 2013년 3월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피겨 사상 두번째로 높은 점수인 218.34점으로 우승하며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김연아는 “부담감 속에 선수 생활을 접을 수는 없었다. 소치 올림픽 무대에서 은퇴하겠다”며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2010년 이후 오직 4번의 국내·국제 대회에만 출전했던 김연아. 하늘이 내린 피겨의 천재는 약속대로 소치 올림픽에서 최선의 경기력을 보여주며 화려하게 마지막 무대를 마무리했다. 소치/허승 기자 rai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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