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경기가 끝나고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인터뷰를 요청받은 이승훈(26·대한항공)은 취재진에게 사과의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밤 늦게 자신의 경기를 지켜본 팬들에게 미안하다는 듯 어깨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이승훈이 8일 저녁(한국시각)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2014 소치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0m에서 6분25초61의 기록으로 12위에 머물며 한국 대표팀에 첫 메달을 안기는 데 실패했다. 경기에 출전한 전체 26명의 선수 중 마지막 13번째 조에서 독일의 파트리크 베케르트와 짝을 이룬 이승훈은 출발 전부터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다. 앞서 레이스를 펼친 스벤 크라머(네덜란드)가 6분10초76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2위를 달리는 얀 블록하위선(네덜란드)과 3위 요리트 베르그스마(네덜란드)가 각각 6분15초71과 6분16초66을 기록하고 있어 6분15초대를 기록하면 은메달은 충분히 노려볼 만한 상황이었다.
이승훈은 첫 200m 구간을 19초19에 통과한 뒤 3000m 구간까지 3분48초46을 기록해 같은 구간을 3분43초94에 통과한 크라머에 4초50 뒤졌다. 이제 승부를 걸어야할 타임이었다. 이승훈은 스타트가 느린 대신 후반에 강했다. 하지만 이승훈은 피치를 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랩타입(400m 1바퀴 기록)이 떨어졌다. 29초 후반, 30초 초반을 기록하던 랩타임이 3000m 구간 이후 30초 중후반으로 오르더니 마지막 3바퀴에서는 31초49, 31초73, 32초63으로 치솟았다. 결국 이승훈은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됐던 레이스 파트너 베케르트(6분21초18·8위)에게도 뒤진 12위로 레이스를 마감했다. 금·은·동메달은 각각 크라머, 블록하위선, 베르그스마의 차지가 되며 네덜란드 3인방이 시상대를 휩쓸었다.
이날 경기를 해설한 김관규 대한빙상경기연맹 전무이사는 경기 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몸이 무거워보였다”며 “이승훈이 자기만의 레이스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김 이사는 “먼저 달린 선수들 기록을 보니 자기 최고 기록보다 평균 5~10초 정도 늦게 나오고 있었다. 이승훈은 15초대로 2위권에 들어갈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부진의 이유에 대해 김관규 이사는 “네덜란드 헤렌벤에서 전지훈련을 할 때만 해도 기록이 좋았던 만큼 일시적인 컨디션 난조일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크라머가 좋은 기록을 찍으니까 그게 부담이 됐을 수도 있고, 같이 레이스를 한 베케르트가 뒤에서 쫓아와야 할 선수인데 자기 앞에 있으니까 당황했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예상 외의 부진으로 기운이 한풀 꺾인 이승훈이지만 아직 끝은 아니다. 이승훈은 17일 10000m 경기와 22일 팀추월 경기를 남겨뒀다. 5000m 경기에서 부진하며 중위권으로 떨어졌지만 이승훈은 여전히 유력한 메달 후보다. 이번 부진이 다음 10000m 경기와 팀추월 경기에 부담으로 작용할지 자극으로 작용할지는 본인의 몫이다.
소치/허승 기자 rais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