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 전문가가 본 이상화
“이상화는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김관규 대한빙상경기연맹 전무이사)
“한국 스케이트 100년 역사에 이상화는 기적과 같은 역사를 썼다.”(제갈성렬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전 감독)
1901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로 온 미국의 선교사 필립 질레트(1874~1939)는 한국에 처음으로 야구를 소개한 사람이다. 질레트는 선교를 위해 1904년 미국에서 주문한 야구공과 방망이, 글러브를 가지고 청년들을 모아 야구를 가르쳤다. 그렇게 해서 그 유명한 한국 최초의 야구팀 황성 와이엠시에이 야구단이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0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 질레트는 세간살이를 정리하면서 불필요한 잡동사니를 경매에 부쳐 팔았다. 그때 황성 와이엠시에이 야구단의 투수 현동순이 15전을 주고 질레트가 사용하던 스케이트화를 샀다. 그해 겨울 서울 삼청동 개울이 꽁꽁 얼자 현동순은 그 위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이것이 역사에 기록된 한국 최초의 스케이트였다.
질레트, 현동순, 그리고 이상화의 100년
2010년 2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이상화(25·서울시청)는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일인자이자 세계기록 보유자인 독일의 예니 볼프를 제치고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다. 밴쿠버올림픽 이전까지 한국은 겨울올림픽에서 17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는데 이는 모두 쇼트트랙에서 나왔다. 스피드스케이팅 사상 첫 금메달의 주인공은 이상화보다 하루 먼저 대회를 치른 남자 500m의 모태범(25·대한항공)에게 돌아갔지만 이상화에게 이것은 시작이었다. 밴쿠버대회 이전까지 한번도 월드컵 대회 정상에 서보지 못했던 이상화는 그 뒤로 매 시즌 월드컵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확하더니 2012~2013시즌부터는 2년에 걸쳐 17번의 월드컵 레이스에서 16개의 금메달을 독식했다. 지난해에는 4번에 걸쳐 세계기록을 경신하면서 150년 빙상사에 유례없는 신기록 행진을 벌였다.
현재 이상화의 최고 기록은 36초36이다. 이상화에 이어 가장 좋은 기록은 왕베이싱(중국)의 36초85로 0.49초의 차이가 난다. 2001년 캐나다의 카트리오나 르메이돈이 처음 37초40대를 기록한 뒤 중국의 위징이 37초 벽을 깨고 36초94를 기록하며 0.46초를 단축시키는 데 11년이 걸렸다. 그만큼 이상화는 다른 선수들을 압도하는 독보적인 일인자가 됐다. 현동순이 처음 스케이트를 탄 지 105년 만이었다.
기영노 스포츠 평론가는 “소치올림픽 98개의 금메달 중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의 이상화가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라며 “이상화는 스피드스케이팅뿐만 아니라 전 종목을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압도적인 선수다. 육상의 우사인 볼트 정도가 비견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관규 대한빙상경기연맹 전무는 “남자 쪽에서는 1992년 알베르빌에서 김윤만이 최초로 은메달을 따기도 했고, 이규혁, 이강석으로 쭉 이어진 계보가 있다. 반면 여자 쪽에서는 1993년 여자선수 최초로 월드컵 대회 금메달을 딴 유선희 이후 20년 가까이 맥이 끊겨 있었다. 그러다가 이상화가 등장했다. 피겨의 김연아처럼 이상화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일궈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무는 “이렇게 생각하면 불행하지만, 솔직히 이상화 같은 선수가 다시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제갈성렬 전 감독은 “누구도 알아봐주지 않던 비인기종목 중에서도 비인기종목이던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이런 성과를 낸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스피드스케이팅에 대한 전국민의 인식을 바꿨다”고 말했다. 제갈 전 감독은 “경기장도 드문 불모지에서 이렇게 독보적인 선수가 나온 것에 대해 해외에서는 한국에서 느끼는 것보다 100배 이상 놀란다. 게다가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도 4년 동안 꾸준히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빙상경기연맹(ISU)에서는 이상화를 빙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한다”고 설명했다.
“여자 쪽에서는 유선희 이후
20년 가까이 두각 못 나타내
그러다가 이상화가 등장했다”
올림픽 우승 이후 월드컵서
금메달 독식하고 신기록 행진 한국 스케이트 100년 역사의
경험과 유산의 결과물인 그는
역대 세번째 ‘올림픽 2연패’ 도전
“지금처럼 꾸준히 노력한다면
평창올림픽도 제패할 수 있다” 코너워크 강점…쇼트트랙 영향 우연한 기적은 없다. 기영노 평론가는 “이상화는 한국 스케이트의 경험과 유산이 집약된 결과물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남자 스피드스케이팅의 두터운 선수층과 세계 최강인 쇼트트랙이 지금의 이상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손기정이 베를린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기 6개월 전인 1936년 2월,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열린 제4회 겨울올림픽 일본 대표팀에는 일본 메이지대학교 조선인 유학생 3명이 포함돼 있었다. 일장기를 달고 대회에 출전한 한국 최초의 겨울올림픽 출전자 김정연, 이성덕, 장우식은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였다. 1948년 스위스의 장크트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겨울올림픽에 이효창, 문동성, 이종국은 최초로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들은 전부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였다. 이때를 시작으로 스피드스케이팅은 한번도 빠짐없이 한국 대표팀에 포함됐다. 지금까지 올림픽 대표팀에 매번 승선한 것은 스피드스케이팅이 유일하다. 한국은 1970년대 이영하를 시작으로 배기태, 김윤만, 제갈성렬, 최재봉, 이규혁, 이강성, 그리고 지금의 모태범까지 이어지는 남자 스프린터의 계보를 만들었다.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에는 이상화 홀로 남아 있었지만, 대신 이상화는 이규혁, 이강석, 모태범이라는 세계적인 남자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할 수 있었다. 1992년 쇼트트랙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자마자 한국은 올림픽 금메달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111.12m의 짧은 트랙(스피드스케이팅은 400m)을 도는 쇼트트랙은 몸이 가볍고 날쌘 한국 선수들에게 유리했다. 한국은 쇼트트랙 최강국이 됐고, 많은 쇼트트랙 선수들이 육성됐다. 그리고 현재 스피드스케이팅은 쇼트트랙의 영향을 받았다. 쇼트트랙은 코너워크에 강점을 갖는다. 쇼트트랙 기술을 연마하면 코너에서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고 레이싱을 펼칠 수 있다. 이상화 역시 초등학교 때까지 쇼트트랙을 배웠다. 남자 빙속의 전통과 쇼트트랙의 역량이 만나 지금의 이상화를 만든 것이다. 한가지 재밌는 건, 한국 쇼트트랙을 세계 최강으로 담금질한 전명규 전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은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이란 점이다. 이상화가 한국 빙상에 끼친 영향도 점점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2월 이탈리아 트렌티노에서 열린 제26회 겨울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한국의 김현영(20·한국체대), 박승주(24·단국대), 안지민(22·서울대)은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나란히 금·은·동을 휩쓸었다. 아직 세계적인 수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한국 여자 스프린터들의 성장세가 눈에 띈다. 김관규 전무는 “이상화가 있었기 때문에 어린 선수들이 좋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다. 어린 선수들이 이상화와 아직 차이는 많이 있지만 우리나라 스케이팅의 기초 수준을 높였다”고 평가했다. 현재 이상화는 다음달 러시아 소치에서 열리는 2014 겨울올림픽에서 미국의 보니 블레어(1988·1992·1994)와 캐나다의 르메이돈(1998·2002)에 이어 역대 3번째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상화가 2018년 평창까지 3연패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제갈 전 감독은 “중요한 것은 이상화가 여전히 성장하는 중이란 거다. 기술적으로도 여전히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곡선주로에서 오른발로 타고 나갈 때 골반이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선상으로 붙어준다면 원심력을 더 이용할 수 있다. 이상화가 이런 점을 보완하며 꾸준히 발전한다면 20대 후반이 되는 평창올림픽 역시 충분히 제패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팟캐스트] [최성진·허재현의 토요팟 #2] 소치의 꽃, 이상화를 만나다
20년 가까이 두각 못 나타내
그러다가 이상화가 등장했다”
올림픽 우승 이후 월드컵서
금메달 독식하고 신기록 행진 한국 스케이트 100년 역사의
경험과 유산의 결과물인 그는
역대 세번째 ‘올림픽 2연패’ 도전
“지금처럼 꾸준히 노력한다면
평창올림픽도 제패할 수 있다” 코너워크 강점…쇼트트랙 영향 우연한 기적은 없다. 기영노 평론가는 “이상화는 한국 스케이트의 경험과 유산이 집약된 결과물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남자 스피드스케이팅의 두터운 선수층과 세계 최강인 쇼트트랙이 지금의 이상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손기정이 베를린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기 6개월 전인 1936년 2월,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열린 제4회 겨울올림픽 일본 대표팀에는 일본 메이지대학교 조선인 유학생 3명이 포함돼 있었다. 일장기를 달고 대회에 출전한 한국 최초의 겨울올림픽 출전자 김정연, 이성덕, 장우식은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였다. 1948년 스위스의 장크트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겨울올림픽에 이효창, 문동성, 이종국은 최초로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들은 전부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였다. 이때를 시작으로 스피드스케이팅은 한번도 빠짐없이 한국 대표팀에 포함됐다. 지금까지 올림픽 대표팀에 매번 승선한 것은 스피드스케이팅이 유일하다. 한국은 1970년대 이영하를 시작으로 배기태, 김윤만, 제갈성렬, 최재봉, 이규혁, 이강성, 그리고 지금의 모태범까지 이어지는 남자 스프린터의 계보를 만들었다.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에는 이상화 홀로 남아 있었지만, 대신 이상화는 이규혁, 이강석, 모태범이라는 세계적인 남자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할 수 있었다. 1992년 쇼트트랙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자마자 한국은 올림픽 금메달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111.12m의 짧은 트랙(스피드스케이팅은 400m)을 도는 쇼트트랙은 몸이 가볍고 날쌘 한국 선수들에게 유리했다. 한국은 쇼트트랙 최강국이 됐고, 많은 쇼트트랙 선수들이 육성됐다. 그리고 현재 스피드스케이팅은 쇼트트랙의 영향을 받았다. 쇼트트랙은 코너워크에 강점을 갖는다. 쇼트트랙 기술을 연마하면 코너에서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고 레이싱을 펼칠 수 있다. 이상화 역시 초등학교 때까지 쇼트트랙을 배웠다. 남자 빙속의 전통과 쇼트트랙의 역량이 만나 지금의 이상화를 만든 것이다. 한가지 재밌는 건, 한국 쇼트트랙을 세계 최강으로 담금질한 전명규 전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은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이란 점이다. 이상화가 한국 빙상에 끼친 영향도 점점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2월 이탈리아 트렌티노에서 열린 제26회 겨울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한국의 김현영(20·한국체대), 박승주(24·단국대), 안지민(22·서울대)은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나란히 금·은·동을 휩쓸었다. 아직 세계적인 수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한국 여자 스프린터들의 성장세가 눈에 띈다. 김관규 전무는 “이상화가 있었기 때문에 어린 선수들이 좋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다. 어린 선수들이 이상화와 아직 차이는 많이 있지만 우리나라 스케이팅의 기초 수준을 높였다”고 평가했다. 현재 이상화는 다음달 러시아 소치에서 열리는 2014 겨울올림픽에서 미국의 보니 블레어(1988·1992·1994)와 캐나다의 르메이돈(1998·2002)에 이어 역대 3번째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상화가 2018년 평창까지 3연패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제갈 전 감독은 “중요한 것은 이상화가 여전히 성장하는 중이란 거다. 기술적으로도 여전히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곡선주로에서 오른발로 타고 나갈 때 골반이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선상으로 붙어준다면 원심력을 더 이용할 수 있다. 이상화가 이런 점을 보완하며 꾸준히 발전한다면 20대 후반이 되는 평창올림픽 역시 충분히 제패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팟캐스트] [최성진·허재현의 토요팟 #2] 소치의 꽃, 이상화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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