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창선 흥국생명 감독
[36.5℃ 데이트] 어창선 흥국생명 감독
어수선한 팀 상황 속 선수들 선물에 감동
‘안아주기 리더십’ 우승 뒤 정식감독 승격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그는 경기 중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벤치에서 소리를 지르며 선수들을 응원하는 게 그의 몫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감독대행 통보를 받았다. 옷은 양복 슈트로 바뀌었다. 경기 중간중간에 스스럼없이 선수들을 안아줬다. 5년 넘게 한솥밥을 먹었지만 처음에는 어색해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하다 보니 익숙해졌고, 선수들과 점점 하나됨을 느껴갔다. 힘들 때건 기쁠 때건 서로 껴안아주기. 어창선(41) 감독이 지난 3월 감독대행으로서 처음 선수들에게 한 주문이었다. 그래야만 잇따른 사령탑 교체로 마음에 생채기를 입은 선수들이 힘을 낼 것 같았다. 서로를 보다듬는 전략은 젊은 선수들을 하나 되게 만들었다. 챔프전 우승, 한국 여자팀 첫 한-일 톱매치 우승이 그 결과물이었다. 흥국생명은 톱매치가 끝난 뒤 곧바로 그를 정식 사령탑으로 임명했다. 그는 맏언니 이효희부터 부상때문에 가슴앓이를 많이 했던 황연주까지 모든 선수들이 고맙다고 했다. 선수들은 포스트시즌 직전 팀컬러인 분홍색 넥타이를 어 감독에게 선물했고, 그는 마지막 챔프전까지 그 넥타이를 풀지 않았다. “내가 선수들을 챙겨줘야 하는데, 오히려 선수들이 먼저 나를 생각해 주는구나 싶어 감격했어요.” 어 감독은 이른바 ‘엘리트 선수’ 출신이다. 형인 어임선 전 대한항공 코치를 따라 배구를 시작해 1987년 세계청소년대회 우승을 맛봤고, 배구 명가 고려증권에서 공격수로 뛰었다. 상무 때 왼쪽 무릎연골이 파열된 뒤 재활에 실패하며 내리막길을 걸은 게 아쉬움으로 남을 뿐이다. 선수 은퇴 뒤에는 증권맨으로 변신해 1년6개월 가량 영업사원으로 뛰었다. 1997년 고려증권이 부도나자, 다른 증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코트에 대한 미련이 그를 배구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그는 “초등학교 코치부터 시작해서 밑바닥에서부터 하나씩 계단을 올라왔다”고 했다. 여자선수들을 지도하게 된 것은 1999년 중앙여고 감독이 되면서부터다. 이후 10여년 동안 여자선수들을 지도하다 보니 까칠한 비(B)형 남자도 부드럽게 변했다. “여자선수들은 특히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해요. 제딴에는 선수를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말한다고 해도 상처입고 그러더라고요. 여자팀 지도자는 선수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게 제일 우선이죠.” 어 감독은 11일 선수들과 홍콩·마카오로 4박5일의 우승여행을 다녀온 뒤, 20일부터 본격적으로 훈련에 돌입한다. 그가 원하는 배구는 움직임이 많은 빠른 배구다. 선수 시절, 그가 작은 키(1m85)를 극복해낸 방법도 빠른 이동공격이었다. “속공과 세트플레이를 같은 급으로 훈련시킬 겁니다. 제자리 공격보다는 속이는 동작을 포함한 이동공격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하려고요. 그러려면 체력 훈련을 많이 시켜야 될 것 같습니다.”
“늘 도전하는 자세로 살아 왔다”는 초보 감독 어창선. 주포 김연경의 해외진출 등 변수가 많아 최근 밤잠을 설친다고 했지만, 또다른 도전을 앞둔 그의 눈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안아주기 리더십’ 우승 뒤 정식감독 승격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그는 경기 중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벤치에서 소리를 지르며 선수들을 응원하는 게 그의 몫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감독대행 통보를 받았다. 옷은 양복 슈트로 바뀌었다. 경기 중간중간에 스스럼없이 선수들을 안아줬다. 5년 넘게 한솥밥을 먹었지만 처음에는 어색해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하다 보니 익숙해졌고, 선수들과 점점 하나됨을 느껴갔다. 힘들 때건 기쁠 때건 서로 껴안아주기. 어창선(41) 감독이 지난 3월 감독대행으로서 처음 선수들에게 한 주문이었다. 그래야만 잇따른 사령탑 교체로 마음에 생채기를 입은 선수들이 힘을 낼 것 같았다. 서로를 보다듬는 전략은 젊은 선수들을 하나 되게 만들었다. 챔프전 우승, 한국 여자팀 첫 한-일 톱매치 우승이 그 결과물이었다. 흥국생명은 톱매치가 끝난 뒤 곧바로 그를 정식 사령탑으로 임명했다. 그는 맏언니 이효희부터 부상때문에 가슴앓이를 많이 했던 황연주까지 모든 선수들이 고맙다고 했다. 선수들은 포스트시즌 직전 팀컬러인 분홍색 넥타이를 어 감독에게 선물했고, 그는 마지막 챔프전까지 그 넥타이를 풀지 않았다. “내가 선수들을 챙겨줘야 하는데, 오히려 선수들이 먼저 나를 생각해 주는구나 싶어 감격했어요.” 어 감독은 이른바 ‘엘리트 선수’ 출신이다. 형인 어임선 전 대한항공 코치를 따라 배구를 시작해 1987년 세계청소년대회 우승을 맛봤고, 배구 명가 고려증권에서 공격수로 뛰었다. 상무 때 왼쪽 무릎연골이 파열된 뒤 재활에 실패하며 내리막길을 걸은 게 아쉬움으로 남을 뿐이다. 선수 은퇴 뒤에는 증권맨으로 변신해 1년6개월 가량 영업사원으로 뛰었다. 1997년 고려증권이 부도나자, 다른 증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코트에 대한 미련이 그를 배구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그는 “초등학교 코치부터 시작해서 밑바닥에서부터 하나씩 계단을 올라왔다”고 했다. 여자선수들을 지도하게 된 것은 1999년 중앙여고 감독이 되면서부터다. 이후 10여년 동안 여자선수들을 지도하다 보니 까칠한 비(B)형 남자도 부드럽게 변했다. “여자선수들은 특히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해요. 제딴에는 선수를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말한다고 해도 상처입고 그러더라고요. 여자팀 지도자는 선수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게 제일 우선이죠.” 어 감독은 11일 선수들과 홍콩·마카오로 4박5일의 우승여행을 다녀온 뒤, 20일부터 본격적으로 훈련에 돌입한다. 그가 원하는 배구는 움직임이 많은 빠른 배구다. 선수 시절, 그가 작은 키(1m85)를 극복해낸 방법도 빠른 이동공격이었다. “속공과 세트플레이를 같은 급으로 훈련시킬 겁니다. 제자리 공격보다는 속이는 동작을 포함한 이동공격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하려고요. 그러려면 체력 훈련을 많이 시켜야 될 것 같습니다.”
“늘 도전하는 자세로 살아 왔다”는 초보 감독 어창선. 주포 김연경의 해외진출 등 변수가 많아 최근 밤잠을 설친다고 했지만, 또다른 도전을 앞둔 그의 눈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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