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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스포츠일반

피멍이 들지라도 링만보면 설레요

등록 2008-05-20 15:28수정 2013-03-04 15:54

IFBA 세계챔피언 1차방어전. 김은영(30.대구 대산체육관)은 18일 서울 양천구민체육센터에서 도전자 쓰나미(26.일본)와 10라운드를 버텼지만 3:0으로 판정패했다.
IFBA 세계챔피언 1차방어전. 김은영(30.대구 대산체육관)은 18일 서울 양천구민체육센터에서 도전자 쓰나미(26.일본)와 10라운드를 버텼지만 3:0으로 판정패했다.
[송기자·조피디의 스포츠다큐]
복서 김은영 세계챔프 1차방어 상경기
“챔피언 벨트 잃었지만 다시 도전해야죠”
대구에서 출발한 기차에서 내려 또 지하철 7호선을 탔다. 8개월 만의 상경. 세계챔피언을 알아보는 이는, 당연히 없다. 권투위원회에서 계체량이 끝났다. 체중을 통과했으니, 물을 마셔도 된다. “꿀물보다 더 달아요. 우리에겐 물 먹는 게 제일 두렵거든요.” 모텔도 잡았다. 경기 전날 숙소다. 뒤늦게 온 엄마는 딸이 먹고싶다던 잡채를 만들어왔다. 휴대폰 화면에 상대선수 사진이 있었다. “마음이 느슨해질 때마다 보려고요.” 프로모터가 내건 대전료는 800만원. “링을 보면요. 지긋지긋하면서도 두근두근거려요.” 징글맞을 정도로 준비하면, 그만큼 설렌다는 것이다. 응원 온 엄마와 동생들은 하룻밤 숙소로 찜질방을 택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그 시기만 지나면 ‘레드 썬’ 하고 사라져요.”

“안 들어가보세요?” “많이 맞고 있다네요.”

엄마는 또 체육관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체육관을 등지고 섰다. 벌써 딸의 열 한번째 경기라지만, 천 번째 경기라도 엄마의 심장을 진정시키진 못할 것이다. 사업부도로 집안이 휘청거리지 않았다면, 예술고에서 그림을 그리다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딸의 손에 지금도 붓이 쥐어져있을 것이고, 그랬다면 옷장사·바텐더 등으로 새벽까지 억척스럽게 일하지 않았을 것이며, 왈가닥 딸이 2004년 말 권투 프로테스트까지 받지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엄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9라운드. 심판이 경기를 멈춰세웠다. 김은영(30·대구대산체육관)의 왼쪽 눈이 너무 부어올랐다. 초반에 배를 너무 맞았고, 그런 바람에 얼굴을 열어줬다. 관중석에서 “심판 끝내”라는 말도 나왔다.

그간 왜 힘들지 않았겠나. 세계챔피언 첫 도전이 실패했을 때 한 달 가까이 ‘잠적’도 해봤다. 지난해 9월 세계챔피언이 됐을 때 관장에게 “그만두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챔피언이 된 다음날에도 아르바이트를 나가야 하는 생활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무릎부상도 심했거든요. 그날 많이 울었어요.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내 스스로 권투를 이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죠.” 뚜렷한 후원사가 없으니 PC방 아르바이트, 바텐더 등을 하며 운동을 병행해야 했고, 경기 한달 전에야 훈련에 전념했다. 왜, 왜 다시 링인가? “피가 나고 멍도 생기지만, 최소한의 생활비를 위해 일도 해야했지만 재밌거든요. 좋아서 하는거잖아요. 여기 발이 문드러지고 피가 맺힐 때까지 잽을 연습하면 내 것이 되는거예요. 예전엔 몰랐는데, 이걸 알게되니까 즐길 수 있게됐어요.”


김은영은 링 닥터에게 “피도 나지않았으니 하겠다”고 했다. 마지막 10라운드. 관장이 눈을 보며 말했다. “끝까지 해. 손 내밀고.” 김은영은 “네!” 대답했다. 종이 울렸다. 그는 상대보다 먼저 일어서 링 중심으로 나갔다.

“전 그래요. 끝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멈춰있지는 말자. 달려야지, 가지 않겠느냐. 그래야 대전역이든 서울역이든 가지 않겠느냐고.”

18일 서울 양천구민체육센터에서 열린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밴텀급 세계타이틀 1차 방어전. 링 아나운서는 “3-0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새 챔피언이 탄생했다”고 알렸다.

경기가 끝나고서야 엄마는 딸을 만났다. “마음이 아프네요. 그래도 우리 딸 씩씩하네요.”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있어서였다. “실패했다고 보세요?” “기대한 분들에게 죄송하지만…. 아니요. 내가 뭘 보완해야 하는지 또 배웠잖아요. 이렇게 많이 맞은 적 없는데 나 정신차리라고 그랬나보다.” “링이 다시 지긋지긋하지 않아요?” “아니요. 또 새로운 맛을 느꼈는걸요. 도전해야죠. 저, 아이엔지(ing·계속 진행)할겁니다.”

송호진기자·조소영피디의 스포츠다큐
송호진기자·조소영피디의 스포츠다큐
비가 내렸다. 그 비를 맞으며 길가에서 관장과 차를 기다리던 김은영이 또 소리쳤다. ‘명랑복서’답게 그새 기운을 차렸다. “재기합니다. 알죠? 아이엔지(ing)!” 벨트를 잃었으나, 한 움큼의 활력을 얻고 간다는 표정이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조소영 피디 다큐 동영상은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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