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 / 김영만 / 강동희
[36.5도 데이트] 13일 은퇴한 김영만
‘허-동-만 트리오’에서 마지막 남은 ‘만’도 유니폼을 벗었다. 강동희(중앙대 86학번) 원주 동부 코치는 “부상만 아니었으면 더 능력을 발휘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허재(84학번) 전주 케이씨씨(KCC) 감독은 “은퇴라는 게 참, 영만이도 서운하고 속상하겠죠”라며 떠나는 후배를 다독였다.
‘사마귀 슈터’라 불렸지만, 동료들은 ‘땡만’이라고 했던 김영만(35·KCC·91학번). “갈 때가 됐잖아요. 마음은 저쪽으로 가고 싶은데 몸이 안따라주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젯밤 이상하게 잠이 안오더라고요”라며 착잡한 마음을 내비쳤다.
그는 13일 전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케이씨씨-동부전에서 고별경기와 은퇴식을 가졌다. 이는 곧 1980~90년대 농구명가 기아자동차의 황금세대들이 모두 퇴장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때가 그립죠. 관중도 많아 농구할 맛이 났으니까. 양반같았던 (한)기범이형, 고기도 줄을 세워 구울 정도로 깔끔했던 (김)유택이형, 순한 (강)동희형, 뒤끝 없는 허재형…. 그렇게 모이기도 힘들죠.”
그는 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 시절 ‘혈서’를 썼던 일화도 떠올렸다. “대회 초반 성적이 좋지 않자, 술집에서 허재 형의 제안으로 모두 혈서를 썼어요. 그리고 우승했죠. 슛은 해야하니까, 왼손을 찢었던 것 같은데….”
2000~01 시즌까지 평균 20점대 득점을 올렸던 김영만은 고등학교까지 센터였다가 중앙대에서 포워드로 전향했다. “처음엔 3점슛을 쏘니까 림까지 안가더라고요. 2년간 엄청 고생했죠.” 센터 출신이라 미들슛이 정확하고, 골밑플레이도 능했다. 몸을 뒤로 제치며 쏘는 페이드어웨이슛에다, 타점까지 높아 가로막기에 잘 걸리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슈터도 수비를 잘 할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된 것 같다”는 본인의 말처럼 강한 수비도 장점이었다. 그러나 1998년 왼무릎 수술과 2001년 허리부상이 겹치며 타점이 조금씩 낮아졌다. 그는 기아, 서울 에스케이(SK), 창원 엘지(LG), 원주 동부를 거쳐 지난 1월 케이씨씨로 트레이드되는 유랑생활을 이어왔다. “은퇴를 고민하다 마침 중앙대에서 코치 제의가 와 결심을 했죠.”
베스트5(1997~98, 98~99 시즌), 수비 5걸(97~98, 2000~01 시즌) 등의 족적을 남긴 그는 “프로감독이 되도록 모교에서 지도자 공부를 잘하겠다”며 “괜찮은 후배들이 많이 나와 농구 인기도 좋아졌으면 한다”고 했다. 그리고 밀어왔던 일 하나를 더 얘기했다. “한달 전 아들을 낳았는데, 지방에서 훈련하다보니…. 둥글이라 불렀는데, 이제 아들 이름도 짓고 출생신고도 해야죠.”
전주/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사진 KC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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